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의 부산진성·동래읍성·다대포진성·김해읍성 공격에 조선군이 성곽 방어전을 벌였지만 모두 하루나 이틀 만에 함락됐다. 신립의 충주 전면전이 대패로 끝나자 선조는 한양도성을 버리고 피란을 선택했고 성곽 방어전도 없었다. 전투가 임박하자 한양도성의 방어력이 없음을 감각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똑같은 선택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도 그대로 재현됐다. 그러면 고려의 개성도성은 어땠는가? 거란·몽골·홍건적의 대군이 수도까지 침략했을 때 임금은 모두 수도를 버리고 피란했으며, 역시 성곽 방어전을 수행한 적이 없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최선을 다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 듯한데, 성곽은 원래 중과부적으로도 적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도록 만드는 시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성곽 자체의 방어력이 없어 그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평지 부분의 성곽 높이가 너무 낮고, 깊고 넓은 해자를 갖추지 않아 압도적 전력을 갖춘 대규모 외적에 맞서 공성전을 벌일 수 없었다. 그 출발은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수도로 만들어진 개성도성에서 시작됐다.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터를 잡아 만든 만월대 궁궐은 진입로의 시작점부터 보이는 하늘-송악산-궁궐의 3단계 상징 풍경에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담아 임금의 권위를 표현했다. 여기서 압도적인 웅장함과 화려함은 송악산이 담당하며, 궁궐은 그런 송악산과 일체감을 연출할 수 있도록 상대적으로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지었다. 그런데 만약 높고 웅장한 성곽과 성문을 지나 그런 궁궐을 봤다면 어떤 느낌일까? 짐작하겠지만, 궁궐의 모습이 훨씬 더 초라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개성도성에서 웅장한 성곽과 성문을 만들지 않은 까닭이다. 이는 고려 시대 문화유전자로 정착해 고려 말부터 축조한 모든 성곽에 적용되면서 조선은 방어력 없는 성곽이 흔한 특이한 나라가 됐다. 물론 산성은 제외다.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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