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킴 뢰닝 감독의 재기발랄한 연출
시원한 영상미에 묵직한 메시지도
무한복제되는 소모품(expendable·익스펜더블)이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 죽으면 끝나는 단 한 번 뿐인 삶을 산다는 이야기는 이제 2020년대 과학소설(SF)의 단골 소재가 되는 것일까. 봉준호 감독의 ‘미키17’의 미키에 이어 요아킴 뢰닝 감독·자레드 레토 주연의 ‘트론: 아레스’도 주인공 아레스가 익스펜더블이다. 다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컴퓨터 그래픽 처리장치(GPU) 속에 설치된 프로그램의 의인화된 캐릭터라는 매우 낯선 설정까지 더해졌다.
8일 개봉하는 ‘트론: 아레스’는 초반 20분이 고비다. 복잡한 SF 세계관으로 관객을 초대하기 위해 1층부터 하나씩 설명해나가지만, 이를 머리에 하나씩 기억해가며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미리 말하자면 세계관에 완전히 몰입하고 난 다음부터 보는 후반전은 더없이 짜릿하며, AI 시대를 살아가면서 생각해볼만한 지점으로 가득하다.
배우 자레드 레토는 마치 3D프린터기가 찍어내는 것처럼 레이저 광선 속에서 만들어져 등장한다. 의인화된 프로그램은 창조주인 젊은 기업가이자 엔지니어인 줄리안 딜린저(에반 피터스)의 명령에 자동 복종한다. 다만 29분이 지나면 까만 재로 변해 흩어지고, 똑같은 기억을 가진 채로 다시 만들어진다.
경쟁회사인 엔컴에 잠입해 엔컴 CEO이자 뛰어난 엔지니어 이브 킴(그레타 리)의 개인 정보를 빼오라는 딜린저의 명령을 받은 아레스는 아테나(조디 터너 스미스) 등 수하들과 함께 출격한다. 뢰닝 감독은 이 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서버 해킹 과정을 정말로 방화벽을 깨부수고 침투하는 액션첩보물로 연출했다. 곱씹어 볼수록 재기발랄한 접근이다.
해킹은 성공하고, 아레스는 이브 킴의 모든 정보를 탈취해 딜린저의 서버로 복귀한다. 이 과정에서 엔컴 사의 백신 프로그램이 가동되어 흰색 병정들이 아레스 일당을 공격하는 단체 액션 시퀀스도 그려진다. 하지만 임무에 성공한 아레스의 눈동자는 이전과 달리 흔들린다. 기술을 인류 공통을 위해 쓰려는 이브 킴의 진심이 아레스의 ‘심연’에 불시착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아레스는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려는 딜린저의 명령에 조금씩 말대꾸를 하고, 까칠한 질문을 하더니 결국엔 자아를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극중 아테나가 ‘변절’한 아레스에게 무섭게 따져묻는 질문이 있다. “명령을 따르는 게 우리의 존재 이유인데,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너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
아레스는 답한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결국 AI도 지금까지 인간이 겪어온 기술과 마찬가지로 누가 어떻게, 무슨 의도로, 누구를 위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가치와 덕목이 정립될 것이란 묵직한 메시지다. 아울러 AI가 인간세계로 나올 수 있다면, 인간이 AI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영감을 주는 SF영화가 탄생했음을 알린다. 12세 관람가.
이민경 기자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