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죄죄하고 둔탁해보이는 저 남자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단서는 반짝이는 푸른 두 눈 뿐이다. 1일 개봉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원 배틀’)에서 실패한 혁명가이자 대마초에 절어든 배불뚝이 싱글대디를 연기한 디캐프리오의 모습에서 이제 영원히 ‘타이타닉’의 잭은 놓아줘도 미련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데뷔 34년차 배우에게서 앞으로 보여줄 모습이 더 기대가 된다면, 그 스타성의 한계란 어디까지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원 배틀’은 시작과 함께 어디론가 뛰는 한 남자와 여자를 비춘다. 남자는 디캐프리오가 연기하는 밥 퍼거슨, 여자는 테야나 테일러가 연기하는 퍼피디아 베벌리힐즈다. 퍼피디아는 체지방 10% 이하의 까맣고 매끈한 근육질 몸으로 빠르게 질주하는 반면, 운동과는 멀어보이는 밥은 숨을 헐떡이며 뜀박질한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이민자 구금소. 각각 리버럴계 무장조직 ‘프렌치 75’의 폭탄 전문가와 행동 대장인 이들은 순식간에 스티븐 J. 록조(숀 펜) 대령부터 그 휘하를 무장해제 시키고 이민자들을 해방시킨다. 폭탄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지만 남성성에 있어선 오히려 퍼피디아에 한 수 접는 밥은 그녀에게 강렬하게 이끌린다. 그런데, ‘강한 여자’ 퍼피디아에게 빠져든 이는 밥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록조 대령과의 ‘악연’은 밥과 퍼피디아의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가 16세가 될 때까지 잡초처럼 끈질기게 이어진다.
‘육아는 혁명가에게 걸맞는 일이 아니’라며 갓난아기인 딸을 두고 가출한 퍼피디아 대신 밥은 자신의 삶을 오직 윌라를 키우는 데 바쳤다. 소파 위에서 대마를 뻑뻑 피워대고 머리는 언제 감은지 모르겠는 떡진 머리에 쉰내날 것 같은 늘어난 옷차림의 배불뚝이 아저씨. 디캐프리오는 충격적인 비주얼로 16년의 시간을 점프해 스크린에 등장한다. 장막 뒤에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비밀 조직 일루미나티를 연상시키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일원이 되려는 록조 대령이 밥과 윌라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런 궁상맞은 삶도 퍽 안락했다.
그런 밥이 기억도 나지 않는 암구호를 다시 외워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디캐프리오는 ‘테이큰’의 리암 니슨처럼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연이은 고난을 겪게 된다. 다만 일방적으로 깨지고 구르는 건 밥 자신이다. 아이맥스(IMAX) 스크린을 통해 더없이 크게 보이는 디캐프리오의 깊은 주름선에서 ‘레버넌트’에 이어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는 것이 느껴진다. 사실 올해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도 각각 ‘미션 임파서블8’과 ‘F1 더 무비’에서 ‘환갑 투혼’을 불살랐지만, 디캐프리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참 어린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는 상남자 캐릭터였다는 점. 현실에선 디캐프리오도 20대 모델만 사귀는 여성 편력으로 유명하지만 적어도 스크린에선 크루즈와 피트보다 훨씬 더 폭이 넒은 캐릭터를 꾸준히 보여준다.
하반기 전세계 박스오피스에 지각 변동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제목을 직역하자면 ‘산 넘어 산’, ‘고생 뒤에 또 고생’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밥이 납치된 딸을 찾기위해 산전수전 겪게 되는 것도, 흑백갈등, 이민자 이슈 등 미국 사회에 도사린 겹겹의 도화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울러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한 거장 감독 PTA(폴 토마스 앤더슨)가 선보이는 시네마의 정수, 디캐프리오에 맞서 징그럽도록 뛰어난 연기를 펼치는 숀 펜으로 인해 161분의 러닝 타임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다. 15세 관람가.
이민경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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