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악보·이상 詩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나면? 서울대미술관 ‘차원의 확장’展

예술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논하자면 끝도 없지만, 그 중 하나는 인식의 한계를 뚫고 생각의 차원을 확장시켜 준다는 것 아닐까. 텍스트로 기록된 시는 낭독으로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하고, 역시 악보는 연주돼 선율을 선사하고,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또한, 만들어진 이미지는 보는 순간 감흥을 불러일으기키도 한다.

지난 1일 개막한 서울대학교미술관의 기획전은 이렇게 ‘다차원적’ 요소를 품고 있는 시, 이미지, 악보, 코드를 ‘차원확장자’로서 규정하고, 청각이나 시간의 흐름 등 다른 차원으로 확대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래서 전시명은 ‘차원확장자: 시·이미지·악보·코드’. 심상용 서울대미술관장은 “현대 미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해 보이는 세계로 가져와 우리의 시각과 의식의 차원을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며 “많은 관객이 전시를 통해 생각의 차원을 넓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순서대로 봐도 되지만, 친숙한 이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백남준(1932∼2006)을 입구 삼아보자. 202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공개된 바 있는 작품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1961)이다. 이는 독일 퀼른에서 작성한 한 장짜리 악보에서 시작됐는데, 백남준은 이 악보에 대해 “만지기, 놀기, 듣기, 발차기, 채찍질까지 모두 포함한 토널 매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번 전시에선 관람객이 보면대에 놓인 악보를 몸으로 연주하는 경험이 가능하다. 이 퍼포먼스는 백남준 생전엔 실현되지 못했으나, 2019년 코펜하겐 덴 프리 전시관에서 한 차례 이뤄졌다.

이상의 시 ‘오 마가쟁 드 누보테’(AU MAGASIN DE NOUVEAUTES)를 시작점으로 삼아도 괜찮은 접근이다. 전시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거울엔 ‘사각안의사각안의사각안의사각 안의 사각.’이란 이 시의 문구가 적혀있다. ‘오 마가쟁 드 누보테’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상품이 있는 상점이라는 뜻. 후대 평론가들은 당시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을 상징하고, 그 안에 진열된 상품과 그 속을 오가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시는 조선건축회 기관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 일본어로 실렸는데, 서울대 중앙도서관 소장품인 이 기관지도 이번 전시에 출품돼 눈길을 끈다. 이 미술관 오진이 학예사는 “당대의 기술·과학적 사고를 예술 언어로 번역한 대표적인 사례”라며 “근대와 현대, 문학과 미술,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가로지르는 작품이어서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이상, 백남준, 구자명, 김호남, 김은형, 정수정, 윤향로, 기민정, 전소정 9명의 작품 약 60점으로 이뤄졌다. 이상의 실험적 시와 백남준의 텍스트 악보를 지나면, 컴퓨터 운영체제와 바이러스를 모티프로 한 구자명의 설치를 만난다. 구자명 작가의 조각 작품들은 컴퓨터 프로그램 소스코드를 시각화한 것이다.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를 작동시키는 운영체제 프로그램 소스코드와 이를 방해하는 컴퓨터 바이러스 소스코드를 시각화해 함께 배치했다. 바이러스 이름은 ‘구름’이나 ‘토끼’ 등 자연을 상징하는 단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자연과 인간이 서로 얽혀 있음을 표현했다.

올해 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공개돼 이목을 끌었던 김호남의 ‘해저 광케이블을 위한 에코챔버 시스템(2024)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김 작가는 글로벌 통신이 이뤄지는 시간차를 시각·청각적으로 드러냈다. 전시장에 설치된 10대의 모니터는 전 세계 9개 도시의 웹 서버와 연결돼 있다. 가깝게는 일본 도쿄, 멀게는 브라질 상파울루. 해저 광케이블을 통해 해외에서 전달된 신호는 도착하는 순서에 따라 모니터와 스피커로 표출된다. 인터넷 신호의 지연과 울림을 반짝이는 윤슬, 잔잔한 파도소리와 함께 공간화한 설치 작업을 마주하고 있다보면, 해저케이블관이 있는 수면 아래로 침잠해 들어간 기분이 든다.

이밖에, 전시는 ▲철학적 개념과 신화를 실뜨개처럼 엮어낸 김은형의 페인트 벽화, ▲보쉬를 연상케 하는 정수정의 환상적 회화, ▲작품 제작과 오늘날 이미지의 생성·유통 조건들을 동기화한 윤향로의 ‘유사회화’, ▲종이와 유리로 회화적 공간을 확장한 기민정의 회화, ▲이상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현재를 포착한 전소정의 영상을 소개한다.

오 학예사는 “작품 속에서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모든 연령대가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친절한 전시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무료. 오는 11월 23일까지 이어진다.

박동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