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40) 왕의 인성과 사생활 - 태종편(中)
정치적 동지였던 계모 강씨와
세자 책봉 싸고 갈등 빚었지만
불만 싹 감추며 협조하는 태도
강씨 죽고 태조 병세 악화되자
기회라 판단, 정적 정도전 척살
이복 형제인 세자 방석 등 제거
부인 민씨, 무기 준비해놓는 등
왕위 등극 과정 큰 역할 했으나
첩 문제로 부부 사이 극도 악화
방원, 결국 처남 4명 모두 죽여
# 때를 기다리는 음흉한 인내력의 소유자
조선이 개국되자, 계모 강씨와 이방원의 동지적 관계는 끝났다. 그들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세자 책봉 문제였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2년 8월, 태조 이성계는 강씨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당시 개국 공신인 배극렴 등은 이방원을 세자로 삼을 것을 요청했지만 태조는 왕비 강씨의 주장에 밀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이후, 방원은 강씨를 정적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칫 강씨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방원이 가장 무서워하던 정적은 계모 강씨였다. 그녀는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개국 공신들은 물론이고 태조마저도 자기 뜻대로 움직였다. 방원은 어릴 때부터 강씨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녀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정몽주 척살 과정에서 알 수 있듯 강씨는 과감하고 냉정했으며, 영악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비록 본처의 자식이라도 영리하고 뛰어나면 기꺼이 품어주며 자기편으로 만들 줄 아는 여자였고, 정적이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릴 만큼 잔인한 구석도 있었다. 거기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보듯 주장이 강하고 야망도 컸다. 그런 그녀였기에 이방원은 몹시 몸을 사렸다. 세자 책봉에 대한 어떤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고,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가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 철저히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이성계의 친아들을 명나라 조정에 입조시키라고 할 때도 주저 없이 명나라로 갔다. 당시 중국을 다녀오는 일은 몹시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다. 거기다 이성계에 대한 악감정을 품고 있던 명 태조 주원장의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볼모로 잡히거나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그런 길이었다. 그런데도 방원은 거부하지 않았다. 목적은 단 하나, 강씨에게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야심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이방원은 그렇듯 음흉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었다. 기회를 잡을 때까지는 절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기다릴 줄 알았다. 하지만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겼다. 또한 적을 공격할 때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무참히 죽이는 잔인한 구석도 있었다. 정몽주를 척살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적이라고 판단되면 반드시 목숨줄을 끊어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이방원은 때가 될 때까지는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기다린 때란 곧 계모와 아버지가 동시에 힘을 잃는 순간이었다.
# 인정사정 보지 않는 냉혈한
다행히 하늘은 그의 편이었다. 그의 최대 정적인 강씨가 자주 앓아눕기 시작한 것이다. 강씨가 처음 병이 들어 누운 때는 개국으로부터 불과 7개월 후인 1393년 2월이었다. 이후로 강씨는 곧잘 앓아누웠다. 방원이 명나라를 다녀온 1394년 11월엔 강씨의 병이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강씨는 아예 병상에서 생활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1396년 8월, 강씨는 마침내 저승의 문턱을 넘어 북망산으로 떠났다.
비록 최대 정적 강씨가 죽었지만, 이방원은 여전히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자 방석과 그를 비호하는 세력들을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태조가 건재해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두 번째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전이 요동정벌론을 내세우며 사병 혁파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방원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사병을 빼앗으려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방원은 극도의 위기의식에 사로잡혔지만 함부로 반발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반발했다간 반역도로 몰려 목이 달아날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수 없이 사병을 순순히 내주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1398년 8월, 그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태조가 병상에 누워 며칠째 일어나지 못했다. 자칫 병세가 더 악화되면 국상을 치를지도 모를 판이었다. 만약 그대로 태조가 일어나지 못하면 왕위는 방석에게 돌아갈 상황이었고, 방석이 왕위에 앉으면 자신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란 불안감이 엄습했다.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될 것으로 판단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던가? 이방원은 정몽주를 격살하여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을 때처럼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398년 8월 26일, 그는 6년간 교묘히 숨기고 있던 야망을 가차 없이 드러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사병을 빼앗는 작업에 앞장섰던 정도전을 격살했다. 또한 방석의 장인 심효생과 정도전과 뜻을 같이했던 남은도 죽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에게 반역의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마침내 세자 방석을 죽이고, 세자의 형 방번도 죽였다. 거기다 그들의 매형 이제도 죽였다. 이 모든 일이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6년을 숨기고 있던 야망을 드러내는 순간, 정적들의 목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것이었다. 여느 인물이라면 세자 방석이나 방번, 이제 정도는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더 현명한 처신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방원은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 모두를 죽여버렸다. 죽이는 것만이 화근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개국 이후 무려 6년 동안 야망을 감추고 음흉스럽게 웃는 낯으로 지내던 그는 막상 본색을 드러낼 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정적의 목숨줄을 잔인하게 끊어놓았다. 이렇듯 이방원은 음흉함과 잔인함으로 무장한 냉혈한이었던 것이다.
# 축첩을 따지는 조강지처, 잔인한 응징을 결심하는 남편
이방원이 왕위를 차지하는 과정에 부인 민씨와 처남들의 공이 컸다. 민씨는 방원의 사병이 혁파될 때 몰래 무기들을 챙겨 숨겨 놓았다가 방원이 정도전을 공격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민씨의 동생 민무구와 그의 형제들은 정도전, 이방간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방원을 용상에 앉힌 최대 공신은 부인 민씨와 처남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그들 부부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 원인은 이방원의 축첩이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여러 명의 후궁을 뒀는데, 이 때문에 왕비 민씨는 몹시 화를 냈다. 태종은 원래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첩이 있었다. 그녀는 곧 효빈 김씨였는데, 김씨는 원래 부인 민씨의 몸종이었다. 그렇듯 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여러 명의 궁녀와 동침을 하였다. 그러자 왕비 민씨는 참지 못하고 왕과 동침한 궁녀들을 중궁전으로 불러들여 다그쳤다. 그 소식을 접한 태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태종은 중궁전에서 일하는 시녀와 환관 20여 명을 내쫓아버렸다. 말하자면 중전의 손발을 다 잘라버린 것이다. 이 사태가 벌어진 1401년 6월 18일부터 태종과 민씨의 부부 싸움이 본격화되었다.
태종의 지나친 축첩에 화가 난 왕비 민씨는 태종의 옷을 붙잡고 울면서 이렇게 따지고 들었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한바탕 부부 싸움이 격화된 후, 왕비 민씨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태종은 며칠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이후 태종과 민씨는 쉽게 화해하지 못했다. 태종은 민씨가 투기가 심하다고 지적하였고, 민씨는 태종이 초심을 잃고 후궁에게 눈이 팔려 정사는 뒷전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아예 민씨 처소를 찾지도 않았다. 또한 민씨가 그렇듯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모두 민씨의 동생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처남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민씨에 대한 미움 감정이 확대되어 처남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일 것을 계획했고, 기어코 네 명의 처남을 모두 죽여버렸다.
작가
■ 용어설명 - 정도전의 ‘사병 혁파’
왕도정치를 지향했던 정도전이 조선 건국 초기 왕자와 종친·공신들이 보유한 사병(개인 군대)을 국가에 귀속시키려 한 정책. 이를 통해 왕권 강화와 군사력의 중앙집중화를 꾀하려 했다. 그러나 운동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이방원 등이 반발해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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