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소설가
나이는 세월 따라 쌓이는데
스스로는 안 변했다고 믿어
권위로 삶을 과시하기보단
품위와 유머로 살아갔으면
이제는 주관적 나이 즐기며
패기 있는 일상 만들어가길
추석 연휴가 최장 10일까지 이어지지만, 명절 연휴 사흘째 동생 가족들의 귀경길이 꽤나 막혔단다. ‘화상으로 봐도 되는데 꼭 만나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명절에는 만나야 맛’이니 어쩌겠는가.
부모님이 하늘나라로 떠나신 지 10년이다. 지인들과 대화해 보니 부모님 가신 뒤에는 자기 가족과 단출하게 지내거나 여행을 즐긴다는 쪽이 많았다. 우리 형제는 차례를 모시는 것도 아니면서 매년 명절이면 천 리 길을 오간다. 피곤함보다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리라. 어느새 우리 형제와 배우자들은 5060이 되었고, 자녀 세대는 30대에 진입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장조카를 향한 “결혼해야 하지 않냐”는 ‘꼰대’ 발언이 나왔다.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지만. 지난 설보다 이마가 약간 더 넓어지면서 아버지의 모습이 슬쩍슬쩍 묻어나오는 동생을 보니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노년기가 코 앞임을 체감하게 된다.
요즘 들어 주관적 연령(Subjective Age)이 아닌 실제 나이를 각성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실제 나이보다 자신을 더 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데, 20대까지는 자신이 실제 나이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들었다고 느낀단다. 30대부터 실제보다 젊게 느끼기 시작하고 40대 이후부터는 10∼15년 정도 젊게 여긴다는 것이다. 세월 따라 차곡차곡 나이가 쌓이는 데도 내면의 자아는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고 굳게 믿는 셈이다.
명절에 가족들과 대화를 하던 중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시니어들이 ‘만 나이’를 말하는데 반해 주니어들은 ‘세는 나이’를 댄다는 사실이다. 생일이 12월 23일인 조카가 두 살이 더 많은 나이를 고스란히 지고 가겠다는 말에 내가 “내년 생일 하루 전까지 만 나이를 고수할 테다”라고 응수해 폭소가 터졌다.
자신을 실제보다 젊게 느끼는 사람들이 더 활동적이고 건강 상태가 더 좋아 수명이 더 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객관적 연령을 자각해야 건강도 챙기고 나이에 걸맞은 교양도 우러나올 듯하다.
내가 기고한 매체의 특성 탓인지 사회 초년생 때부터 유난히 노년 세대를 많이 만났다. 연륜이 깊은 분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때로 반면교사가 된 분도 계시다.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어제 일처럼 또렷한 기억이다. ‘수출주도냐 수입대체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서 수출주도를 택해 오늘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데 자부심이 매우 큰 분을 만난 자리였다.
대뜸 나의 출신 학교를 묻더니 “최고 대학 경제학과를 나오지 않고 나를 만나러 왔냐”고 힐난하듯 말하더니 프린트물 하나를 주며 나가서 읽고 오라고 했다. 옆 사무실에 갔더니 비서가 “이해하세요. 오시는 분마다 다 받는 테스트입니다”라며 대신 사과의 말을 했다. 자료를 읽고 들어가자 이번에는 갑자기 구두시험을 보듯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 과정 끝에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줄 알아, 그걸 알아듣기나 하겠어, 요즘 다 엉망진창이야”라는 말이 중간중간 튀어나왔다.
‘훌륭한 판단을 했고 나라의 기틀을 만든 건 감사하지만, 그 사실을 윽박지르며 주입시켜야 공적이 드러나는 걸까’ 하는 생각과 함께 제정러시아 시대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외투’가 떠올랐다. 어렵게 마련한 외투를 강도에게 빼앗긴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경찰관에게 고소하고 고관에게 간청했다가 허세에 가득 찬 그들의 고압적 태도에 눌려 절망하다 편도선염으로 열이 올라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다음날, 그분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 계셨던 분을 뵈었다. 그분은 겸손하고 조용하게 말씀하셨다. “중요한 시대에 내게 그런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고 하실 때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노년이 되면 어떻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까진 못했지만, 새삼 품위와 교양이 넘치던 그 어르신이 생각난다.
기억에 남는 어른은 ‘유머가 있는 분’이다. 문우회에서 내가 유독 따랐던 Y 선생님은 항상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분이셨다. 모임이 있을 때면 문우회 차원에서 선물을 하는 데도 꼭 꽃다발을 들고 와 주인공에게 건네며 “우리 솔직히 이거 받을 일 없잖아”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모일 때마다 책이 안 팔린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Y 선생님이 “요즘 책을 안 읽기 때문에 책 선물도 함부로 하면 안 돼. 제가 책 드려도 될까요? 공손하게 물어보고 받겠다고 하면 그때 줘야 돼. 우리같이 장편 쓰는 사람은 특히”라고 하셔서 웃음이 터졌다.
씁쓸한 일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Y 선생님이 어느 날부터 모임에 나오지 않으셨다. 치매에 걸려 약속 시간을 잊으셨던 것이다. 딸이 사회관계망(SNS)에 올린 Y 선생님의 치매 일기가 화제가 되었고, Y 선생님의 책이 역주행하여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딸이 유명 토크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문우회 모임 때면 온통 Y 선생님의 얘기로 가득했다. 나에게 주기적으로 전화해 따뜻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모두에게 그렇게 하셨다는 걸 알고 놀랐다.
이번에 조카들의 나이를 실감하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권위와 위세로 밀어붙여 나이가 벼슬이냐는 말은 듣지 않아야겠기에. 품위 있고 유머 있게 살아야겠다는 각성과 함께 주관적 나이를 즐기며 패기로 나아갈 결심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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