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년 6월 15일,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이념을 표방해 국호를 고려로 정했다. 그리고 고려의 건국이 하늘(天)이 내려준(授) 천명(天命)으로 이뤄진 것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기 위해 연호를 천수(天授)로 했다. 919년 1월에는 궁예의 국가에서 왕건의 국가로 바뀌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의미에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닮은 철원에서 풍수 도시 개성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936년 8월 6일, 왕건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신검의 후백제군과 천하의 패권을 놓고 벌인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했다. 수도의 관점에서 보면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풍수 도시가 아닌 신라, 후백제, 태봉의 수도를 역사에서 완전히 밀어내고 풍수 도시 개성을 유일한 수도로 만든 사건이었다. 혹시라도 반풍수를 기치로 내건 역성혁명이나 대규모 반란이 성공해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고 풍수와 관련 없는 수도를 만들지 않는 한, 고려에서는 수도와 궁궐의 조영 및 권위 표현에서 풍수의 절대적인 지위는 바뀔 수 없었다.
왕건은 고구려 계승 이념의 조치로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대우했고, 훈요십조에서는 임금이 매년 100일 이상 머물 것을 명시했다. 그리고 이후 신라 출신이 득세하면서 987년(성종 6)에는 경주대도독부를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켜 임금이 개성, 서경, 동경을 번갈아 체류하며 나라를 경영하는 3경 체제를 완성했다.
1067년(문종 21)에는 개성에서 너무 먼 경주를 대신하기 위해 양주를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켜 개성, 서경과 함께 임금이 번갈아 머무르며 나라를 경영하는 새로운 3경 체제를 만들었다. 양주 관내에서 개성 못지않은 풍수의 명당을 발견하여 도시를 건설한 후 양주의 중심지를 옮기게 하면서 한 조치였다. 이는 풍수 도시가 우리의 역사에 등장한 두 번째 사례인데, 조선의 수도 서울 지역이었다. 원래 양주의 중심지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성 아래의 광나루 지역에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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