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고문

안전자산인 금과 위험자산인 주식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경제 상식이다. 호황 때 주식이 오르고 불황 때는 위험 회피를 위해 금을 찾는다. 이런 상식이 깨지고 있다. 올 들어 금값이 50% 넘게 오르고, 주식과 비트코인 등 모든 자산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이른바 ‘에브리싱 랠리(everything rally)’다.

그 배경엔 달러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무려 7조 달러가 풀려 글로벌 유동성 과잉이다. 선진국들이 엄청난 국가부채에 허덕대는 것도 문제다. 이로 인해 미국 30년물 국채 수익률은 4.7% 고공행진 중이고 일본의 30년 국채 수익률도 3.2%까지 치솟았다. 그렇다고 증세나 재정 지출 삭감은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오히려 정치적 반발을 피해 인플레이션으로 해결하려는 꼼수가 나타나고 있다. 물가가 오르면 채무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한몫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전쟁은 4년째 계속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전쟁도 확산 일로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일본·유럽에서 1조5000억 달러를 현금으로 뜯어내 미 시장에 뿌리겠다고 큰소리친다. 돈값이 더 떨어질 것 같으니 앞다퉈 화폐에서 탈출해 금·주식·비트코인으로 몰려간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7월 광의통화(M2)는 4344조 원으로, 전월 대비 36조 원 늘었다. 전년 동기보다 7.1% 늘어 올 들어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소비 쿠폰이 대거 풀렸기 때문이다. 정부는 확장 재정을 천명하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올해 49%에서 2029년 58%로 올라간다고 예고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적자 국채 100조 원 발행은 경제의 터닝 포인트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돈이 넘쳐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유동성이 증시와 가상자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종 종착지인 서울 아파트로 향해 몰려가는 불길한 조짐이다. 과잉 유동성은 자산 거품을 부르고 경제를 망친다. 화폐의 타락이다. 한국은행이 “집값 상승과 환율 불안, 가계 부채가 부담스럽다”며 기준금리 인하를 망설일 정도다. “통화를 타락시키는 것보다 한 사회를 허무는 더 교묘하고 확실한 수단은 없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경고를 모두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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