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보영 정치부장

 

北, 냉전 붕괴 이후 최대 위상

열병식에도 중·러 2인자 참석

우크라 파병에 높은 경제성장

 

李정부는 ‘북핵 용인’ 수순 속

‘제재 체제’ 붕괴 후는 안갯속

APEC서 원칙·담론 정립해야

북한이 1990년대 냉전 붕괴 이후 최대의 외교적 모멘트를 맞고 있다. 10일 우중(雨中)에 열린 노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은 북한의 달라진 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중국 공식 서열 2위인 리창(李强) 총리와 러시아 권력 서열 2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옆에 섰다. 베트남 정상인 또럼 공산당 서기장도 참석했다. 중국 총리의 공식 방문은 16년 만, 베트남 서기장의 방북은 18년 만이었다. 전례 없는 흥행이다.

이는 지난달 3일 ‘톈안먼 모멘트’에서부터 예견됐다. 김 위원장은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섰다. 북·중·러 정상이 마지막으로 한자리에 모였던 1959년 중국 건국 10주년 열병식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는 떨어져 서 있었던 김일성 주석에 비하면 엄청난 위상 변화다. 북한은 구소련 붕괴 이후 30여 년간 ‘고난의 행군’과 코로나19 팬데믹의 위기를 견뎌낸 뒤, 신자유주의 체제가 균열하면서 만들어진 ‘힘의 공백’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전쟁 파병은 외교뿐 아니라 경제에도 엄청난 플러스 효과를 가져왔다. 북·러 군사동맹이 복원되면서 든든한 ‘뒷배’를 얻었고,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했던 북한 경제도 지난해 성장률 3.7%(한국은행 추정)로 8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김 위원장이 “풍요로운 낙원을 세우겠다”고 장담하는 배경이다.

반면, 한국의 외교는 총체적 위기 상황이다. 미국 단극체제와 신자유주의가 흔들리면서 한국으로선 전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질서 이행기에 직면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관세전쟁’과 동맹의 현대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고, 일본의 극우 지도자 등장 가능성으로 한·미·일 공조 미래도 가늠이 어렵다. 북한은 핵무기 100개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우라늄 2000㎏을 보유”(정동영 통일부 장관 추정)하게 됐고, 미국 본토에 대한 핵공격이 가능할 수 있는 ‘완성형’에 가까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까지 개발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외교정책은 늘 실기(失期)했다. 정권에 따라 늘 갈지자였기 때문이었다. 북핵 협상은 30년간 경제·안보 보상을 둘러싼 단계적 협상과 일괄타결, 대화와 압박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고, 대북정책도 정권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갔다. 이재명 대통령의 ‘E.N.D 이니셔티브’도 이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특히, 핵시설 신고 및 사찰·검증의 구체적 내역이 빠진 북핵협상론이 실효성이 없다는 것은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5년 9·19 공동성명, 2018년 미·북 싱가포르 공동성명 파기 과정에서 여실히 증명되지 않았나.

이재명 정부의 안보관도 다시 과거 진보 정권으로 돌아갔다. 북한 열병식이 “북한 내부 행사”라는 대통령실 관계자 인식이 대표적이다. 열병식에 등장한 무기 대다수가 남측을 겨냥하고 있고, 김 위원장이 “한국 영토가 안전한 곳이 될 수 있겠나” 협박하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다. 이런 인식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연일 제기하고 있는 ‘남북 평화적 2국가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더욱 위험하다. 헌법 제3조의 한반도 영토 조항 개정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북핵 중단을 포함한 이재명 정부의 3단계 비핵화론과 함께 2개 국가라는 논리로 사실상 북핵을 용인하겠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러시아가 이미 인정하고 중국마저도 기우는 가운데, 핵심 당사국인 한국이 동조한다면 “북한은 핵보유 국가(nuclear power)”라고 수차례 언급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도 북핵을 용인해줄 수 있다. 이는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라는 문턱을 9번째로 넘게 되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순간이다. 지난 30여 년간 치열하게 이어져 왔던 북한 비핵화 협상의 종말이자, 북한 압박에 주효했던 대북 제재가 무용화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기존 체제 붕괴 이후는 ‘국익 기반 실용외교’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거시적 변화이기 때문에 보다 명확한 원칙과 담론을 제시해야 한다. 10월 연쇄적으로 열리는 아세안 정상회의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이런 현실을 인식하고 종합적 정책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멘텀이 되기를 바란다.

신보영 정치부장
신보영 정치부장
신보영 기자
신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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