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안 인터뷰 -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내륙 - 섬나라 사이에 낀 연안국
양쪽 침략 받는 지정학적 운명
동진하는 러시아와 관계 개선
전통적 우방 미국과 합종 통해
中·日보다 먼저 북극항로 개척
여야 막론 한국 정치인의 임무
기회 놓치면 후손에 죄짓는 일
거점 부산항 배후 인프라 필요
최근 ‘북극항로’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던 북극항로 개척이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과 함께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에서는 의원들이 북극항로 관련 법안(북극항로 특별법)을 발의하는 한편, 정부는 ‘북극항로 태스크포스’(TF)를 출범하고, 내년도 관련 예산 5500억 원을 편성하기도 했다. 이런 정부의 움직임이 가능했던 건 오랜 기간 북극항로의 중요성을 얘기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한 사람인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를 지난달 29일에 만났다. 그는 북극항로 개척을 “천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며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것은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어떻게 북극항로를 연구하게 됐나?
“윈스턴 처칠의 명언 중 ‘비관론자는 기회 속에서도 위기를 보고 낙관론자는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본다’고 얘기했는데, 나는 이것을 ‘패배자는 기회 속에서 위기를 보는 사람이고, 승자는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보는 사람이다’라고 해석한다. 지금 지구온난화 탓에 북극해가 녹아내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이를 위기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사실 이 북극항로를 기회로 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점에 당황했다. 그래서 ‘이건 문제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연구를 하게 됐다. 또 어린 시절 ‘우리는 왜 침략의 역사를 갖고 있나’라는 궁금증도 한몫했다. 한국인들의 트라우마 같은 것인데, 나 역시 열등의식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문명사를 공부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일례로 유럽 중심 국가인 프랑스는 영국의 2배에 달하는 국토를 갖고 있다. 인구는 3배가 넘는다. 양국이 백년전쟁 이래 16번의 전쟁을 치렀는데, 전장은 대부분 프랑스였다. 영국이 프랑스를 침략했다는 의미다. 영국은 섬나라고, 프랑스는 바다와 내륙 사이에 낀 연안국이다. 연안국은 육군이 전력의 80%인 반면, 섬나라 영국은 해군이 100%다. 연안국 옆에 섬나라가 있으면 이 섬나라가 연안국을 침략하는 것이 지정학적 운명이란 점을 깨달았다. 또 독일의 경우 독일은 프랑스보다 작은 나라다. 하지만 1·2차 대전 모두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했다. 내륙국가(독일)와 도서국 섬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연안국은 양쪽에서 침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를 ‘지정학적 저주’라고 불렀는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역시 섬나라 일본과 엄청난 힘을 가진 내륙국가 중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리한 조건하에서도 국가적 존엄성과 민족적 정체성을 지켰다는 게 정말 대단한 일이고, 이게 내 문명사 연구의 결과이자, 연안국으로서 우리에게 북극항로가 왜 중요한지 얘기해주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북극항로는 우리나라에 어떤 의미인가?
“전략적으로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고대 국제 정치 외교의 기본은 ‘원교근공(遠交近攻·먼 곳과 사귀고 가까운 곳은 친다)’인데, 우리는 과거 인근 중국·일본을 넘어 교류를 할 대상이 없었다. 정말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북극항로는 지정학적 큰 변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유럽으로의 진출이 막힌 러시아가 동진하며 우리의 원교 대상이 될 수 있다. 전통적 우방인 미국도 중국의 패권 도전을 막기 위해 우리를 새로운 원교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중국·일본과의 경쟁 측면에서 북극항로가 중요하다는 의미인가?
“산업·무역 측면에서 구조적으로 한국·중국·일본은 상품 경합도가 매우 높다. 향후 인공지능(AI)이나 반도체와 같은 첨단 품목으로 경쟁을 할 텐데, 이 경쟁에선 승패가 존재한다. 결국 이 관계는 적대적으로 가기 쉽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우 핵무기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석유·천연가스 등 세계 에너지 부국이다. 식량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소비재 등에선 경쟁력이 없다. 미국은 첨단 원천기술 보유국이다. 일부 산업은 경쟁하지만 대부분 우리와 보완적 관계에 있다. 러시아의 동진과 미국의 ‘피벗 투 아시아’ 전략은 우리의 지정학적 저주를 지정학적 축복으로 바꿔줄 것이며, 북극항로가 생기며 발생하는 지정학적 변화의 가장 큰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기존 남방항로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가?
“유럽 무역 항로로서 물류비용 측면에서 북방항로에 경쟁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적 문제도 안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에도 남방항로를 활용하는 것은 위험성이 있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필리핀·베트남 간의 분쟁이 있다. 수에즈운하 통과도 중동의 호르무즈해협의 불안정성이 문제다. 믈라카해협도 적체 상태에 이르렀다.”
―지금 왜 서둘러야 하나?
“천재일우의 기회를 낚아챌 준비를 해야 한다.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다. 러·우전 이후 러시아는 유럽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 동진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러시아는 정권을 위협할 전후 불황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양의 석유와 가스를 서둘러 팔아치워야 한다. 이것을 중국·일본에 한번 빼앗기고 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 우리가 러시아의 동진과 그들의 자원을 선점하기 위해선 1년 남짓 이내에 서둘러 러시아와 극적인 관계 개선을 이끌어 내야 한다. 현재 미국은 중국 압박에 전념을 다하고 있는데, 중국이 미국에 굴복하고 나면 미국에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중국보다 낮아지게 된다. 1980년대 미국이 일본의 경제적 도전을 막기 위해 체결한 1985년 플라자합의로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의 경제 불황을 겪고 한국은 경제가 약진하는 반사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에 굴복한 뒤 미국은 일본을 한국보다 우선하는 동맹으로 대우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굴복 이후 중국은 미국에 가장 큰 시장을 가진 더 중요한 동맹이 될 가능성이 높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5∼10년 사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성공과 실패는 앞으로 5년 내 결정되고 말 것이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의 명언대로 ‘행운의 여신이 다가왔을 때 그 옷자락을 잡아채는 것이 정치인의 임무’라면 북극항로 선점은 여야를 막론한 대한민국 모든 정치인의 임무다.”
―현시점 러시아와 교류하기 쉽지 않다.
“군사적 안보는 경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경제적 윈윈 관계가 이뤄진다면 군사적 갈등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러·우 전쟁으로 러시아와 관계를 맺는 것이 요원해 보이지만,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러시아를 대하는 다른 나라의 태도가 돌변할 것이다. 이미 블라디미르 푸틴은 그 신호를 여러 번 보냈다. 종전 이후 러시아와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미국 역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해야 한다. 푸틴이 전쟁 기간 북한과 손을 잡았지만 전쟁이 끝나면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다. 푸틴은 전쟁 기간 중 한국에 대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제공하지 않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와의 관계 개선을 기대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중국·일본은 지금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무엇보다 러시아와 관계 개선에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보다 북극항로 개척에 더 관심이 있고 앞서 있다. 일본은 에너지 문제를 해소하고자 진주만을 공격했다가 패전한 경험이 있다. 에너지 공급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러·우 전쟁 기간 동안 유럽연합(EU)으로부터 제재를 받으면서도 러시아와 함께 추진하는 ‘야말 프로젝트’에서의 투자를 철회하지 않았다. 러시아와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방증한 사례다. 중국은 북극항로가 열리면 가장 크게 혜택을 볼 국가다. 그들은 자신들을 ‘준북극국’이라고 강변하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북극이사회(북극과 영토를 접한 나라들 집합체)’ 옵서버로 참여하고 있다. 중국 내 상하이, 닝보, 선전 등의 항구들이 북극항로 거점 항구로 인정받기 위해 경제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북극항로로 이미 배를 띄우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만 35회 정도 운항을 시도하며 데이터를 누적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이들을 쫓아가야 한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중국·일본 모두 러시아와 영토 분쟁 이슈가 있기에 관계 개선에 한계가 있다.”
―북극항로 개척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까지 국내 어떤 정치 지도자도 북극항로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현 정부가 대선 당시 이를 공약화했고, 해수부를 부산으로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거점 항구 확보정책을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해수부 이전으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거국적으로 여야가 힘을 합쳐야 가능하다. 정부는 물론 언론도 함께 북극항로 개척을 위해 국론을 모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이를 정쟁거리로 삼는다면 천년에 한 번 올 이 기회를 놓치고,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게 된다. 또 지금 쇠락하고 있는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을 살려야 한다. 중국 항구들과 경쟁하기 위해 필수다. 부산항이 환적항으로선 세계 2위에 해당하지만 거점 항구가 되기 위해선 배후 인프라가 필요하다. 항구에 들어오는 배들의 벙커링(연료 공급)이 필요한데, 국제협약으로 인해 이젠 천연가스나 수소·암모니아 등 청정연료를 공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울산 화학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고, 배들의 수리를 위해선 거제 일대의 조선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다. 이런 배후 인프라를 제대로 갖춰야 부산항이 제대로 된 거점항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침체된 부울경, 그리고 철강의 포항까지 부산 인접 지역의 활성화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95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공과대학 학사, 웨스트버지니아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콜로라도 스쿨오브마인스 자원경제학 박사 △한국자원경제학회 회장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수석보좌관 △서울대 공과대 산업공학과 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북극해 거쳐 亞·유럽·북미 연결… 남방항로 대비 물류비·시간 절감
■ ‘북극항로’는…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통과해 아시아, 유럽, 북미를 연결하는 해상 운송 경로를 일컫는다. 북극해의 러시아 연안을 따라가는 북동항로(NSR), 캐나다 북부를 지나는 북서항로(NWP), 그리고 북극 중앙을 횡단하는 중앙 북극횡단항로(TSR) 등이 포함된다.
북극항로는 기존 남방항로(수에즈운하 통과, 2만2000㎞, 34∼40일 소요) 대비 약 30∼40% 정도 짧은 거리(1만5000㎞, 약 30일 소요)를 제공해 아시아-유럽 간 해상 운송의 주요 대안 경로로 각광받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물류 운송 거리를 줄여 물류비와 시간 절감 효과가 크다.
북극항로는 빙산과 유빙으로 인해 통과가 어려웠지만, 최근 기후변화로 북극 해빙이 줄며 대형 선박의 상업 항해가 가능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북극 해빙 상태 예측의 어려움, 극지 환경 훼손 우려, 러시아 등 특정 국가의 통제 및 이용료 문제, 그리고 위성통신(INMARSAT) 제한 등 여러 환경적·정치적 제약이 따른다. 국제 협력과 제도 정비도 북극항로 상용화의 핵심 과제로 꼽힌다.
한편 해양수산부는 내년도 북극항로 사업 관련 예산을 올해(4458억 원)보다 23.4% 증가한 5499억 원으로 편성했다. 쇄빙선 건조 지원과 친환경 쇄빙 컨테이너선 기술 개발, 극지해기사 양성 등을 새로 추가하고 부산항·진해신항 등 메가포트 개발 사업 예산을 늘렸다.
박정민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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