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건 없어요/ 끔찍한 일이 가끔 있고/ 대부분은 그저 그래요// 생을 바쳐 풀어야 할 문제들도 없어요/ 답은 다 다르니까요// 창밖으론/ 어느 날은 검고 어느 날은 푸른 강물이/ 끝도 없이 흘러가고/ 기적처럼 자신의 근육으로/ 우주에 이르는 이야기를 들려줘요

- 허연 ‘병가’(시집 ‘작약과 공터’)

가을에 맡은 강의의 첫머리. 한 주 푹 쉬고 온 얼굴들을 둘러보곤 물었다. 명절 연휴 동안 무얼 하셨나요. 마냥 쉴 수만은 없었겠지. 어느 대목에선가 책을 펼쳐 들었을 것이란 기대를 품고 물었다. 잠시 침묵. 그게 이상했는지 어색했는지 다들 웃음을 터뜨린다.

학생 중 한 명이 되묻는다. 선생님께선 무얼 하셨어요. 충분히 짐작 가능한 질문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돌아왔다. 나는, 저 그러니까. 잠시 말을 고른다. 고백하자면, 더는 연휴가 즐겁지 않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양가 부모님과 친척네 인사 다니는 게 일이다. 기대되거나 신나는 일이랄 게 없다. 어찌어찌 책을 펴들어도 병든 닭처럼 졸기나 할 뿐이다. 어릴 적 추석을 생각해본다. 큰집에 가는 일 자체가 모험이었지. 밤을 따고 작은 물고기들이랑 놀고 밤에는 친척들과 옹기종기 누워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깔깔대다 잠들곤 했다. 어쩌면 자영업자여서일지도 모른다. 맞춰 쉬는 게 사치 같다. 증발해버린 매출은 어떻게 메우나. 이번 달 월세는 어떻게 해결하나. 부모님께 내밀 봉투를 마련하면서 손이 곱아들 때의 괴로움은 또 어떻고. 그러니 명절 연휴를 어떻게 보냈느냐면 괴로웠어요. 상심도 컸고요. 커가는 조카들을 보며 속절없는 세월만 확인하네요. 물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빙긋 웃었을 따름이다.

수업이 끝나고 빈 교실 뒤편 널찍한 창 앞에 서서 비가 쏟아지는 걸 구경한다. 비가 그치고 나면 제법 쌀쌀해지겠지. 그와 같은 자연의 순리가 삶에도 있으며 내게도 찾아온다는 걸 새삼 서러이 여길 이유가 있나. 그럼에도 쓸쓸하고 좀 아픈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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