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일본 자민당이 내우외환에 빠져 있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의 사퇴 선언 후 자민당은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를 새 총재로 뽑았지만, 연정파트너인 공명당의 이탈로 집권이 불투명해졌다. 다카이치가 군소 야당을 끌어들여 총리가 될지, 아니면 야당 쪽으로 권력이 넘어갈지 예측불허다.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저서 ‘옥중수고’에서 ‘낡은 세계는 사멸하고 있지만, 새로운 세계는 형성되지 않고 있다’고 했는데 요즘 일본 상황이 딱 그렇다. 자민당 중심의 구질서는 붕괴됐는데 새 질서는 오리무중이어서 과도기적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일본이 권력 공백기의 위기를 맞고 있는 가운데 이시바가 ‘전후(戰後) 80년 소견’이란 장문의 글을 지난 10일 내놓았다. 일본의 역대 총리가 전후 50년이었던 지난 1995년부터 10년 주기로 담화를 발표해온 전통에 따른 것인데, 무라야마(村山)·고이즈미(小泉)·아베(安倍) 담화 때와 달리 내각의 결의를 거치지 못한 탓에 개인 의견 형식으로 발표됐다. 역대 담화에서는 과거 침략에 대한 사죄·반성 등이 언급됐지만, 이시바는 ‘과거 담화를 바탕으로 역사 인식은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언급한 뒤 본격적으로 왜 일본이 승산도 없는 전쟁에 무모하게 빠져들었는지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 원인을 정부·의회의 무능, 군부의 독주, 언론의 상업주의로 규정한 뒤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대중영합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정치인과 사명감을 지닌 저널리즘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이시바의 ‘소견’은 20세기 초 일본을 군국주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정치의 실패를 분석하는 형식이지만, 현재 자민당의 파벌·금권 정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읽힌다. 자민당 기득권 세력이 “집권이 불확실해진 마당에 총리가 불난 집에 기름까지 부었다”고 반발하는 배경이다. 이시바는 지난해 10월 총리 취임 전 ‘아시아판 나토(NATO)가 필요하다’는 글을 미국 허드슨연구소에 보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총리직을 맡으며 21세기 아시아 안보 체제에 대한 새 제안을 한 데 이어 총리 퇴임에 앞서 정치와 언론에 민주주의를 위한 역할을 각별히 당부해 눈길을 끈다. ‘미움받을 용기’를 갖고 시종일관 바른말을 하는 그의 소신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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