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융합연구원장
경주 APEC 정상회의 2주 앞
이벤트로는 주최 장점 못 살려
미중·미북 회동은 우리 영역 밖
APEC의 전략적 의미 큰 변화
국제질서 새로운 틀 짜기 시작
한국 ‘외교 설계력’ 입증할 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가 오는 31일 경주에서 열린다. 1993년 첫 회의 이후 APEC은 21개 회원국 간 경제 협력의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으며, 전 세계 인구의 37%, 교역량의 49%,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우리나라는 2005년 부산회의에서 ‘부산로드맵’을 주도하며 APEC 제도 발전에 기여한 바 있다.
언론과 정치권은 이번 회의를 두고 ‘미·중 정상회담’ ‘도널드 트럼프-김정은 회동’ 가능성 같은 장면 연출형 외교에 매달린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한국은 미·중 두 강대국이 각자의 전략에 끌어들이려는 대상일 뿐, 질서 설계의 파트너가 아니다. 한국이 미·중 사이 ‘가교’가 되거나 미·북 대화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할 공간은 애초에 없다. 2018∼2019년 미·북 협상에서 북한은 한국을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 조롱했고, 미국은 협상 구조에서 한국을 배제했다. 외교 무대의 장면은 강대국이 만든다. 질서를 설계할 역량이 부족한 국가는 주변을 맴돌 뿐이다. 그런데도 일회성 외교 이벤트에 기대 성과를 연출하려는 시도는 전략 부재를 감추는 정치적 포장일 뿐이며, 국민을 오도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태도가 APEC의 본질적 의미를 흐리고 한국이 전략 의제를 선점·설계할 기회를 스스로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오늘의 국제질서는 단순한 ‘신냉전’이 아니다. 공급망과 기술 네트워크는 국경을 넘나들며 결합하지만, 가치와 규범은 오히려 균열되는 분절 경쟁 질서가 펼쳐지고 있다. 군사력 경쟁도 심해지고, 여기에 기술 패권과 공급망 통제가 더해지면서 군사·기술·경제가 중첩된 전략 경쟁 시대가 열렸다. 총과 탱크의 경쟁 위에 반도체·배터리·디지털 규범 경쟁이 겹친 것이다. 이 환경에서 반도체 공급망, 배터리 가치사슬, 기술 표준과 디지털 통상 규범은 곧 국가안보이자 국력의 핵심 지표다. 외교의 승패도 수사(修辭)가 아니라 경제안보 구조를 설계하는 능력에서 결정된다. 바로 여기에서 APEC의 전략적 의미가 드러난다.
한국이 이번 회의에서 집중해야 할 전략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공급망·기술·표준을 결합한 전략경제 구상을 주도해야 한다. 반도체·배터리·인공지능(AI)·우주·양자 등 핵심 분야에서 기술표준 연합, 이른바 기능동맹을 선점해야 한다. 둘째, 중견국 연대 허브로 도약해야 한다. 호주·캐나다·일본·싱가포르·칠레 등 실용 외교국들과 소다자(minilateral) 경제안보 협력체를 구축하고 공급망·에너지·방위산업을 연결하는 신뢰 네트워크를 제도화해야 한다. 이는 이해 조정 차원을 넘어 규범과 법치를 공유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이며, 국가 매력도를 기반으로 한 신뢰외교가 핵심이다. 셋째, 인도태평양-유럽 연계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한·유럽연합(EU) 디지털 파트너십, 인·태경제프레임워크(IPEF), 나토(NATO) 협력을 APEC과 연계해 대륙 간 공급망·규범 연동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전략 원칙 또한 분명해야 한다. 중국이 중요하지만, 미국은 필수다. 중국은 최대 교역 파트너로서 관리해야 할 현실적 관계이고, 중국식 질서 확대는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과 개방경제 기반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반면, 미국과의 제도적 연계는 공급망·기술·금융 규범을 공유함으로써 한국의 국익을 구조적으로 뒷받침한다. ‘트럼프 변수’에도 불구하고 미국 시스템은 조정 능력과 제도 복원력을 갖춘 전략 플랫폼이다. 문제는, 한국 외교가 이러한 전략 구도를 국민과 국제사회에 설계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교는 구호가 아니라 구조이며, 이벤트가 아니라 전략이다.
이제 언론도 외교를 정쟁의 틀로 소비해온 관행을 돌아봐야 한다. 외교를 정치공학으로 다루면 국익은 흔들리고 외교 역량은 소진된다. APEC 의장국은 21개국 순환 체제상 다시 오기까지 20여 년을 기다려야 하는 전략 자산이다. 경주 회담은 외교 이벤트가 아니라, 한국이 질서 설계 역량을 가진 국가인지를 증명하는 무대다. 한국은 더는 ‘끼인 나라’가 아니다. 역할을 요구받는 국가가 됐다면, 이제 역할을 설계하는 국가가 돼야 한다. 국익은 설명 없는 구호가 아니라, 전략·구조·행동으로 확보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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