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교류학

정수일 지음│창비

문명교류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문명에 대한 연구는 이미 200여 년 전부터 시작됐지만 문명교류 담론이 형성된 것은 이제 50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생소한 학문은 정수일이라는 학자의 인생 그 자체이기도 하다.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위장해 국내에서 북한 공작원으로 활동했고 199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복역한 이후에는 한국에 정착해 평생을 동서문명교류사 연구에 매진한 그는 한국의 실크로드 연구를 세계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렸고 지난 2월 작고하기 전까지 이를 멈추지 않았다. 이 책은 그 오랜 여정의 결실이자 학문적 유산이다.

책은 ‘인류가 문명을 서로 교환한다’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통찰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문명이 학계의 오랜 통설인 ‘자생성’과 ‘모방성’만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문명들이 결과물을 주고받으며 확장되는 과정, 그 안에서 생기는 ‘공유성’이라는 속성이 곧 인류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가 일생을 바쳐 탐구한 실크로드는 그 교류의 상징이다. 낙타가 오가던 오아시스의 길에서, 대항해시대의 바다로, 오늘날의 글로벌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는 인류 문명의 동맥이었다.

그의 연구는 기존의 문명 담론을 깨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으로 대표되는 서구문명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토인비는 문명이 불리한 환경으로부터의 ‘도전’에 대해 성공적으로 ‘응전’해야 탄생과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문명의 역사는 충돌이 아니라 융합과 공존의 연속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문명은 경계가 아니라 길”이다.

8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개론서는 결코 가벼운 읽을거리는 아니지만, 정수일이 왜 한 시대의 학문적 거목으로 평가받는지를 확인하기엔 충분해 보인다. ‘문명교류학’은 단순한 연구서가 아니라 문명이라는 개념의 발전사와 문명교류학의 등장, 그리고 정립 과정까지를 다룬 그의 개척기다. 860쪽, 5만8000원.

신재우 기자
신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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