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상하는 뇌

애덤 지먼 지음 |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외부신호 받아들여 해석하는 뇌

빛·소리 조율해 눈앞에 보여줘

물체 떠올리기만해도 동공 수축

이미지 훈련으로 근육 자라기도

의대 교수 · 신경과학자인 저자

상상-현실의 밀접한 관계 주목

‘상상은 현실이 된다.’ 자기계발서 베스트셀러에서나 숱하게 보았을 법한 말이다. 원하는 것을 꿈꾸다 보면 언젠가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는 이제 너무 많이 반복돼 피로감마저 느끼게 한다. 영국 엑서터대 의대 교수이자 신경과학자인 저자는 이와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상상의 결과가 현실’이라고 말이다.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다. 뇌가 외부 신호를 해석하고 스스로 빈틈을 채워 만들어낸 상상이야말로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상상을 통해 질서를 부여하고 조율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단지 난잡한 빛과 소리의 덩어리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현실은 뇌가 만든 제어된 환각’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현실을 직시한다’라거나 ‘현실 감각이 있다’ ‘현실적이다’라는 수식어를 상상과 대척점에 있는 어휘처럼 사용해왔던 우리는, 사실 상상 없이 현실을 바라볼 수조차 없는 존재들일까.

전봇대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사람인 줄 착각해 소스라치게 놀란 기억,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아기 울음소리로 착각한 기억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는 지각이 물리적 현실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주어진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라, 이성의 판단에 앞서 상상에 의해 먼저 해석되고 구성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1500년대 활동한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감각은 이성이 판단하기 전에 상상에 전달된다”고 일찌감치 말했다. 시각을 예로 들면, 우리는 뇌에 축적된 지식을 활용해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고 앞으로 무엇을 보게 될지 예측하고 의미를 생성해낸다. 저자가 “인간의 시각 경험 대부분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상상의 산물”이며 “상상은 항상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개인을 넘어 사회적 차원과도 연관을 맺고 있다. 개인의 경험뿐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도록 형성된 문화적 유산, 즉 언어와 상징체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물론, 인간은 외부 감각 자극 없이도 상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빵을 떠올려보라”는 지시만으로도 우리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빵의 표면에서부터 고소한 냄새까지 금세 떠올릴 수 있다. 감각 자극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을 ‘심상’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과학자들이 시각 심상을 떠올리는 행위가 실물을 들여다보는 행위, 즉 시각 경험과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해냈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노르웨이 오슬로대 브루노랭과 우니 술루트베트는 사람이 밝은 물체를 떠올리기만 해도 동공이 수축했다는 사실을 연구 결과 확인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의 조엘 피어슨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이미지를 보여주기 전에 특정 패턴을 ‘상상하라’고 지시했더니, 상상 속 패턴이 다른 이미지보다 더 잘 지각된다는 걸 발견했다. 이는 시각을 상상하는 것과 실제 시각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촉진하거나 방해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이어진다.

다만 무엇을 상상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며, 그 범위와 강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창의적 상상에 반드시 심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심상이 거의 없이도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한 인물로, 저자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회장인 에드윈 캐트멀을 소개한다. 그는 “꿈을 꿀 때조차 심상을 보는 일이 거의 없다”고 저자에게 고백했음에도 세계에서 가장 창의력이 요구되는 기업을 이끌어왔다. 저자는 이들을 가리키기 위해 ‘아판타시아’(aphantasia)라는 용어를 만들어내 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음의 눈을 가리킬 때 사용한 단어 ‘phantasia’에 부재를 뜻하는 접두사 ‘a’를 붙인 것이다. 정반대로 심상이 너무 생생해서 실제로 보는 것에 필적할 정도라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이퍼판타시아’(hyperphantasia)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상상이 실제 지각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의 관심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저자는 “상상력을 통해 기술을 연습하거나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질문을 던진다. 책에는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생각만 해도 신체 근육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험 결과들이 소개된다. 30년 전 미국 아이오와대 연구원 광유에와 켈리 콜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새끼손가락을 장애물에 대고 15초 동안 최대한 세게 누르는 상상을 매일 15회씩, 4주 동안 하게 했다. 그 결과 ‘정신 연습’만으로도 근력이 상당히 증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상상이 뇌의 운동계에 일으키는 변화 때문이다. 이미지를 떠올리면 일차운동피질과 운동뉴런, 근육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뇌 네트워크 전체에서 활동이 증가하게 된다. 이 밖에도 상상을 이용해 고통을 완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플라세보 효과’로도 증명된다. 아무 효과도 없는 플라세보 같은 물질도 긍정적 기대나 상상이 동반된 상태에서 투여된다면 상당한 통증 완화를 이끌어낸다는 사실이 영국 옥스퍼드대 아이스 트레이시 등의 실험으로 드러났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당신이 공상이나 망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순간에도 상상은 도처에 있으며, 그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것이다. 당신이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고 여기는 지금에도 말이다. 368쪽, 2만2000원.

인지현 기자
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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