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일기자의 여행 - APEC 정상 집결하는 경주, 꼭 가봐야할 남산
유적 200곳 넘고 유물 700여점
‘자연·예술 조화’ 山전체가 보물
높은 암봉 ‘용장사곡 삼층석탑’
일연이 묘사한 풍광 보이는 듯
목이 잘려나간 ‘석조여래좌상’
몸체 조각만으로 감탄 자아내
상반신만 남은 불상 ‘입곡석불두’
경건함에 앙코르와트 사원 연상
산 병풍삼은 ‘창림사지 삼층석탑’
경주시내 내려다보여 명품 풍경
절집 ‘보리사’ 연꽃위 앉은 불상
첫눈에도 “잘생겼다” 경탄 절로
경주=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 경주라면 ‘무조건 남산(南山)’인 이유
경주는 유적과 유물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다. 한 번 여행에서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첨성대, 포석정, 동궁과 월지 같은 대표 유적만 보기에도 벅차다. 첫 여행이라면 대표 유적이 우선인 건 당연하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라면 얘기가 다르다. 경주는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 가는 여행지가 아니다. 경주 여행이 두 번째 이상이라면? 고민할 것 없이 남산으로 가야 한다. 남산에 오르지 않았다면 열 번을 다녀온대도 ‘경주를 보았다’고 할 수 없으니까.
단언컨대 경주의 시간은 남산에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세월에 풍화된 시간이 그곳에 있다. 신라 사람들은 남산의 편편한 바위에 불상을 새기고, 널찍한 터가 있으면 절을 지었으며, 높은 바위에는 탑을 세웠다. 바위에 부처를 새겼다기보다 바위 안에 갇힌 부처님을 정으로 쪼아내 꺼냈으며, 차곡차곡 쌓은 탑은 신라사람들의 두 손 모은 기원을 재료로 삼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산속에 새기고, 짓고, 세운 것도 그렇지만, 더 감동적인 건 그 위로 지나가고 있는 시간이다. 폐허가 돼버린 절터와 무너진 탑, 파괴된 불상. 이 모든 것들이 10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와서 풍화돼 가는 중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것들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곧 ‘섭리’다.
남산에는 남아 있는 유적만 200곳이 넘고, 확인된 유물만 700여 점에 이른다. 남산은 자연과 예술이 조화를 이뤄 산 전체가 보물인 곳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남산으로 간다. 추천하는 건 삼릉에서 용장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서남산 코스’다. 삼릉에서 출발해 금오산 정상을 거쳐 용장계곡까지 이어지는 코스다. 이 길을 따라 남산을 올라보면, 왜 남산을 ‘신라가 남긴 천 년의 감동을 품고 있다’고 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남산을 보는 법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코스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유적과 유물을 감상하면 된다. 남산 탐방은 유적과 유물을 ‘선(線)’으로 잇는 코스다. 어떤 코스를 걷겠다고 결심하기만 한다면, 그다음은 별다른 도움이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길 위에서 유적과 유물을 저절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경주를 찾은 이들에게 어찌 됐든지 남산에 올라가도록 만드는 것. 그게 경주 여행을 안내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 점(點)으로 말하는 경주 남산
그래서 탐방코스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는다. 남산에는 서남산 코스와 함께 동남산 코스와 고위산 코스도 있고, 거미줄처럼 이어진 길을 이어붙여 만든 수많은 코스가 있다. 이 중에서 서남산 코스를 추천하는 것으로 ‘선(線)’에 대한 얘기는 갈음하고, 경주 남산을 점(點)으로 말하기로 한다.
지금부터는 남산 주변의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에 집중한다. 다만 한 곳. 잘 알려져 있는 곳이지만 서남산 코스의 ‘용장사곡 삼층석탑’만큼은 빼놓을 수 없다. 산 전체를 기단 삼아 세상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탑이 주는 특별한 감동 때문이다.
용장사곡 삼층석탑은 산 위의 바위에 있다. 남산에는 높은 바위에 세운 석탑이 드물지 않다. 절집 마당의 낮은 자리에서나 봤던 탑이, 높은 암봉에 올라서 있는 건 낯설다. 절집 마당의 탑이 기도와 기원을 ‘내려놓는 자리’란 느낌이라면, 산 위의 암반에 세운 남산의 탑은 사바세계를 굽어보는 느낌이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 그러고 보면 탑은 산 위가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남긴, 삼국시대 경주 풍경을 묘사한 문장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 ‘절은 별처럼 늘어서 있고, 탑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있다’는 뜻이다. 그의 말처럼 경주의 탑이 나는 기러기처럼 줄지어 있었다면, 편대 비행하는 기러기의 맨 앞자리쯤을 용장사곡 삼층석탑이 차지하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하며 저물 무렵의 삼층석탑 곁에 서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야말로 ‘명품 조망’이다. 화선지에 쿡 찍은 먹이 번지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고요한 평온으로 젖어드는 듯했다.
# 흩어진 유적을 마음으로 다시 세우다
삼층석탑 바로 아래에는 마애여래좌상과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마애’란 벼랑에 새겼다는 뜻. 연꽃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자비로운 인상의 여래를 새겼다. 마애불이 돌에 새긴 것이라면 석조여래좌상은 조각이다. 3개의 둥근 원반 모양의 돌 위에 올려져 있다. 목이 잘려나간 불상이지만, 몸체의 조각 솜씨만으로도 감탄이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용장사의 대현 스님이 기도할 때 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린 미륵부처’가 나오는데, 바로 이 불상이 아니었을까.
용장 능선에서 또 하나 삼층석탑과 함께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 용장골 정상 높은 암반에 남겨진 커다란 연화대좌(蓮花大坐)다. 불상은 진작 사라졌고 연꽃(蓮花)을 새긴 받침돌(대좌)만 남았으니 그냥 봐서는 아무것도 아닌 듯싶다. 여행자들의 눈길도, 발길도 끌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상상력으로 공간을 읽어내면 생각이 달라진다. 낭떠러지 끝에 대좌가 있고, 그 앞으로 계단 한 단의 참배할 자리만 겨우 남겨뒀다. 장중한 기운이 감도는 범상치 않은 자리. 그래서 연꽃을 새기고 그 위에 불상을 세웠을 것이었다. 볼 줄 아는 사람은 본다. 오랜 시간이 지나 불상은 사라지고 없지만 터만 남아서 빛나고 있는 것을….
어디 용장골의 연화대좌만 그럴까. 남산에서 보는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감상하려면, 심미안과 함께 꼭 갖춰야 할 덕목이 상상력이다. 되도록 느리게 걸으면서 무너진 절을 마음으로 다시 세우고, 흩어진 유물이 서 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용장계곡 아랫마을은 용장리다. 모두가 절 용장사에서 비롯한 이름들이다. 용장사는 남산에서도 손꼽히는 대가람이었다. 언제 절이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초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머물며 ‘금오신화’를 썼다니, 지금은 절터의 축대와 기와 조각들이 뒹굴고 있지만 조선 중기까지는 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 석불에서 앙코르와트를 떠올리다
남산 주변에는 불국토였던 신라의 유적이 그야말로 ‘널려’ 있다. 가장 훌륭한 것들은 다 박물관으로 가고, 노천에 남아 있는 건 옮길 수 없는 것이거나, 퇴락하고 부서진 것들이다. 100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을 제자리에서 견디며 비바람에 풍화된 것들을 눈부시게 하는 건 ‘오래된 시간’이다.
온전한 유적을 평가하는 기준은 빼어난 미감이나 비례, 혹은 기법. 하지만 쓰러진 것들은 이런 기준으로 가늠되지 않는다. 미감이나 비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뭉클함 같은 게 무너진 것에 있다. 무너지고 부서진 것들은 마음을 건드린다. 화려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무너진 채 건너온 시간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걸 전제하고, 이런 심상을 느끼게 하는 경주 남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입곡석불두’를 꼽는다. 포석로의 절집 함월사 근처에 있는데, 그동안에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 희미해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것이 최근 네이버 지도에 ‘남산입곡석불두’란 지명으로 위치가 정확하게 표시됐다. 휴대전화를 켜 들고 쉽게 찾아갈 수 있게 됐으니 고마울 따름. 이곳뿐만 아니다.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남산의 흩어진 유적 중 적잖은 것들의 위치가 네이버 지도 위에 찍혀 길잡이를 해준다. 전자지도의 힘이다.
입곡석불두 앞에서 떠올린 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다. 규모를 비교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불두(佛頭)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앙코르와트의 사원이 떠올랐다. 입곡석불두는 ‘입곡(入谷)이란 계곡에 있는 불상의 머리’란 뜻. 본래 거대한 광배(光背·아우라)를 등 뒤에 두고 서 있는, 부처(여래)상이었다. 석불이 쪼개지면서 하체 부분은 없어지고, 받침돌과 머리부터 가슴까지만 남은 걸 일렬로 놓아두었다. 상반신의 높이는 1.27m. 추정하건대 처음 새겼을 당시의 불상은 3m가 넘는 대불(大佛)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굴암 본존불에 비교해도 손색없는 신라 최전성기의 작품’이란 게 경주남산연구소의 평가다.
# 구릉 석탑 뒤로 펼쳐지는 풍경
포석정 근처에는 등 뒤로 남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이곳 역시 여행자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다.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길도 잘 다듬어지지 않았다. 좁은 농로 길을 구불구불 따라 들어가야 하는 데다 길 끝에 주차장도 없어서 운전해서 찾아간다면 주의해야 한다.
창림사는 신라 최초의 왕궁터에 세워졌다는 절집. 지금 절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경주 남산에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크다는 석탑 한 기만 서서 경주의 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석탑은 윗부분이 없어졌는데도 높이가 6.5m에 달한다. 윗부분, 그러니까 상륜부가 있었던 때에는 9m에 달하는 거대한 탑이었으리라. 석탑은 1979년 복원 과정에서 받침돌 일부에 새로운 돌을 쓰긴 했지만 탑이 가진 장중함은 잃지 않았다. 기단 한쪽에 새긴 불교를 지킨다는 수호신인 ‘팔부신중(八部神衆)’ 조각의 섬세함도 1200여 년의 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 탑을 시작으로 팔부신중을 탑에 새기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뒤로 물러나서 바라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 석탑에서 보면 경주 시내 풍경이 펼쳐지는데 야트막한 구릉 위의 탑 한 기가 정면으로 세상 모든 풍경과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주변에 피어나기 시작한 억새도 운치를 더해 주니 요즘 같은 가을이 창림사지 삼층석탑을 만나는 최고의 계절이다. 가을에 경주에 간다면 부디 놓치지 마시길….
아, 그리고 탑에서 발견된 발원문 얘기를 덧붙인다.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쯤에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허물어지면서 탑 조성 과정에서 왕실의 안녕과 중생의 구제를 기원했던 ‘창림사무구정탑원기’가 나왔다. 추사 김정희가 그걸 자기 문집에 베껴 두었고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가 1968년 경기 이천 영원사 대웅전 기둥 아래서 출토됐다는 사실이 2011년에야 확인돼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은 수원 용주사의 효행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대체 그게 어떻게 거기까지 갈 수 있었을까.
# 잘생긴 불상과 근사한 두 기의 탑
남산 동쪽에는 절집 보리사가 있다. 남산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이라고 했지만, 남도의 대찰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종각과 법당 대여섯 동이 절집의 전부인데, 이 절에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 있다.
불상은 첫눈에도 ‘잘 생겼다’는 경탄이 절로 나온다. 불상의 비례부터 조각 솜씨와 보존 상태까지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다. 긴 눈을 가늘게 뜨고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불상도 훌륭하고, 불상 뒤쪽의 광배에 새긴 화염과 연꽃무늬도 눈여겨볼 만하다. 부처가 연꽃 위에 앉아계시니 말 그대로 ‘연화화생(蓮花化生)’이다. 절집이 남산의 산자락에 있어서 불상을 등 뒤에 두고 내려다보는 경주 시내의 모습도 근사하다.
보리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남산동 동서삼층석탑이 있다. ‘양피사(讓避寺)’라는 절이 있던 터에 남아 있는 탑이다. 삼국유사에는 ‘염불사’라는 절이 등장하는데, 원효의 제자인 스님이 낮이나 밤이나 염불을 외워 본디 피리사(避里寺)였던 절집 이름이 염불사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유사에서 양피사는, 염불사의 위치를 설명하는 데 등장한다. 말하자면 양피사는 삼국유사에서 조연도 못 되는 엑스트라 격이었는데, 지금은 빼어난 풍모의 두 기의 석탑이 양피사 자리를 기념하고 있다.
동서삼층석탑은 나란히 선 두 기의 석탑인데, 형식도 높이도 다르다. 서탑은 불국사의 석가탑에 버금가는 조화와 균형미를 갖췄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탑이다. 상층 기단에는 팔부신중을 돌아가면서 조각했다.
동탑은 전탑의 양식을 띠고 있는 모전(模塼) 석탑이다. 모전이란 전탑을 모방했다는 뜻인데, 벽돌 모양으로 자른 돌을 쌓아 세운 탑을 말한다. 동탑이 힘차고 거친 느낌이어서 남성다운 느낌이라면, 부드럽고 화려한 서탑에서는 여성미가 느껴진다.
# 남산 아래서 만난 한글 비석 하나
이번에는 신라 얘기 말고, 경주 남산 자락에서 만난 요즘 얘기. 남산 자락에는 신라 때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를 올렸다는 유적지 상서장이 있는데, 상서장 아래 인왕동에 최햇빛의 기념비가 있다. 비석은 단출하다. ‘밤길도 오래 걷다 보면 새벽을 맞이한다’는 문장과 함께 최햇빛 이름 석 자가 전부다.
최햇빛은 경주 출신 재야 한글학자다. 1910년 경주 남산 자락 아래 인왕동에서 태어나 2000년 작고할 때까지 경주에서 한글운동가로 평생을 살아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일본 국어교사와 한글 문제로 충돌을 일으켜 중퇴한 뒤 만주와 일본을 전전하며 방황하다 20대 중반에 고향 경주로 돌아온 그는 국어학자 최현배를 스승으로 모셨다. 경주 군청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무성영화 변사 일도 했던 그는 변사 생활을 그만둔 뒤 한글 부흥운동에 몰두했다.
아내와 자식, 며느리, 손자의 이름을 모두 순우리말로 고쳐 불렀고, 마을 이름도 우리말로 고쳐 지었다. 주례를 선 부부가 낳은 400여 명의 아이에게 한글 이름을 지어 주기도 했다. 경주의 ‘음지’ 마을이 ‘해맞이 마을’이 됐고, ‘문천’이 ‘반달마을’이 된 것도 그의 노고 덕이었다.
평생을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한글 운동에 열정적인 그를, 제자들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 걷기’에 비유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이제 애를 그만 쓰라’는 얘기였다. 제자의 권유를 들은 최햇빛의 대답이 “밤길을 걷다 보면 새벽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단다. 그를 추모하는 작은 비석에 새겨진 문장이다.
비석은 그의 제자와 시민, 돌 공장 사장까지 돈을 보태 2011년 세운 것인데, 처음 세워진 곳에서 옮겨져 한동안 방치되다가 경주문화원장, 석공 명장 등이 주도해 201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경주 남산 자락에는 통일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물론이고 평생을 떠돌던 매월당 김시습의 자취도 있고, 한글 사랑으로 평생을 살았던 최햇빛의 흔적도 있다.
■ 일상이 여행으로
경주의 원도심인 황오동에는 ‘행복황촌 마을기업’이 있다. 협동조합의 형태로 운영되는 마을기업은 주민들의 게스트하우스를 마을 호텔로 묶어 운영을 지원하고, 식당을 운영하며 체험프로그램도 진행한다. 황오동에서 인상적인 것은 마을 호텔이다. 오래된 골목 안에는 주민들이 주택을 개조해 만든 19개의 숙소가 있는데, 소박한 가정집 형태부터 적산가옥을 개조한 펜션, 자쿠지와 작은 풀장을 거느린 호화로운 숙소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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