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풍경
사진·글=문호남 기자
콘크리트 벽면이 거칠게 갈라져 있다. 그 위에는 수십 겹의 스프레이 페인트가 덧칠돼 있다.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 등 여러 색깔이 서로를 뒤덮고 있다. 그림과 문장, 기호들로 새롭게 태어났다. 겉으론 무질서해 보이지만, 가까이 살펴보니 나름의 질서가 보인다. 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 바로 압구정 토끼굴이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와 한강공원을 잇는 지하 통로로, 우리나라 그라피티 문화의 성지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한강을 따라 달리던 중 처음 이곳을 마주했다. 발걸음을 멈춰 벽을 한참 바라보았다. 허락받지 않은 예술의 흔적 속에서 자유와 저항, 그리고 젊음의 숨결을 느꼈다. 하지만 이 다채로운 목소리들은 조만간 사라질 예정이다. 서울시가 시민의 안전한 보행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한강 주변 노후시설을 리모델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입구에는 내년 7월 완공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공사가 끝나면 압구정 토끼굴은 안전하고 단정한 통로로 재탄생할 것이다. 벽면의 화려한 흔적은 사라진다. 이처럼 도시의 변화는 종종 예술의 자리를 바꿔 놓는다. 때로는 그 자리가 좁아지기도 하고, 또 다른 공간에서 새롭게 열리기도 한다. 토끼굴은 단순한 지하 통로가 아니었다. 도시가 예술과 타협한 드문 장소였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벽이기도 했다. 회색으로 덮인 자리 위로 언젠가 또 다른 색이 피어날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손끝과 마음에 있다.
문호남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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