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는 나치 체제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학자로 유명하다.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냉혹하게 비판했던 그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되자 아예 나치당에 입당해 공식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논문 ‘독재론’(1921)에서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자’라고 썼는데, 이 글은 바이마르공화국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히틀러가 총통 지위에 올라 독재로 나갈 수 있는 이론적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9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치 치하에서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에서 슈미트 열풍이 불고 있다. 벤 스테일 미국외교협회(CFR) 국제경제국장은 최근 포린어페어스(FA)에 게재한 ‘베이징에서 슈미트를 읽다’(Reading Schmitt in Beijing)에서 “1979년부터 2003년까지 중국에서 슈미트 글을 인용한 학술 논문은 미미했으나 이후 매년 급증해 현재는 20여 년 전보다 30배 이상 증가했다”면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반박한 사상가의 글이 인기를 끄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썼다. 2000년대 초 시작된 중국의 ‘슈미트 열풍’은 시진핑 시대에 앞서 중국 기류가 일당독재 강화 쪽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준다. 중국 경제 성장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 달러가 넘으면 개혁개방 바람 속에서 정치적 자유가 확장될 것이라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식 낙관론과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진핑과 블라디미르 푸틴, 김정은 등 권위주의 지도자들에게 유난히 친근함을 표해왔다. 최근 백악관에 초대형 연회장 조성 사업을 일방 강행하며 논란이 일자 “대통령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이 같은 주장은 슈미트식 총통의 무한 권능 논리와 닮았다. 미국은 1945년 나치 체제를 허물고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구축했는데, 미국의 질서 속에서 몸집을 키운 중국이 나치식 체제를 꿈꾸고 트럼프가 이를 추종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미중 정상이 30일 김해에서 회담한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후쿠야마식 낙관론이 저물고, 슈미트식 비관론이 커지는 상황에서 트럼프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조롱하며 시진핑의 스트롱맨 리더십을 찬양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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