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49) 헝가리 부다페스트

 

12세기 번영 동서 교통 요지

물류 집결 ‘도나우강의 진주’

나치·소련 침공에 지옥 경험

 

에스테르하지 ‘생산의 소설’

사회주의 선전 신랄하게 풍자

 

크러스너호르커이 ‘사탄 탱고’

전체주의로 자율성 상실 묘사

“천국? 지옥? 피안? 다 헛소리

환상에 마음 뺏기면 진실 잃어”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도나우 강 너머로 보이는 국회의사당, 다리 등을 촬영한 위성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도나우 강 너머로 보이는 국회의사당, 다리 등을 촬영한 위성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에 앉아 있었다. 갈림길이 나와도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고, 덜컹거리는 낡은 트럭이 자기 생을 결정짓는 것을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헤어날 길이 없다.’ 무감각하게 그는 생각했다.”

‘사탄 탱고’에서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말했다. 1985년 발표된 이 작품은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기 직전, 헝가리의 한 집단농장 사람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먹구름에 싸인 하늘, 흩날리는 낙엽, 수시로 울리는 사이렌 등은 종말에 처한 세계의 풍경을 극화한다. 좌절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은 무기력하다. 전체주의 사회에 길들어 자율의 힘을 상실한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위대한 마법사’를 망연히 기다린다.

어느 날, 죽었다고 알려진 옛 지도자 이리미아시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사람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그가 비참한 이 세계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걸 믿고 열광한다. 그러나 섣부른 희망은 깊은 절망의 다른 얼굴이다. 탱고가 여섯 걸음 전진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듯, 이리미아시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이들은 남은 재산마저 모두 잃고 절망한다. 불안의 거미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손쉬운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예언에 혹하나, ‘단번에 구원’을 약속하는 자는 천사의 얼굴을 한 사탄에 불과하다. 구원은 인간적 의미를 느리고 천천히 자기 삶에 새겨 넣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작가는 카리스마 예언자들이 흔히 구사하는 단순하고 명료한 문장을 수십 쪽에 걸쳐 이어지는 복잡한 만연체 문장들을 통해 교란함으로써 독자가 이런 진실을 체험하게 이끈다. 희망을 일구려는 자는 작가에게 정해진 답을 내놓으라고 하는 대신, 한없이 이어지는 지지부진한 일상에서 헤매면서 스스로 의미를 이룩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적 유토피아의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인 사회주의 붕괴가 남긴 교훈이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고, 세상은 다시 희망을 조작하는 카리스마 예언자들이 날뛰는 중이다. ‘헤르쉬트 07769’(2021)에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한 청소부의 입을 빌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다가올 종말을 경고한다.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오르반 빅토르의 장기 집권 속에서 전체주의로 치닫는 헝가리의 현실,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스트롱맨’들이 날뛰는 현실에서 우리를 포획한 더욱더 큰 어둠을 암시한다.

헝가리는 ‘마자르인의 나라’란 뜻이다. 수도 부다페스트는 2025년 현재 인구 약 170만 명, 중부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도나우강의 진주’로 알려진 이 도시는 1873년 부다, 페스트, 오부다가 합쳐져 생겨났다. 종말과 폐허, 구원과 회복의 서사는 부다페스트 역사에서 익숙하다. 동서 교통의 요지에 놓인 지정학적 특성 탓에 발전과 쇠퇴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아시아 유목민인 마자르인이 부다 지역에 뿌리내린 건 896년쯤이다. 전설에 따르면, 부족장 7명이 뿔피리에 피를 받아 함께 나누어 마시고, 혈맹으로 나라를 건설했다고 한다. 997년 마자르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지도자 버이크는 프라하 주교에게 이슈트반이란 세례명을 받고, 헝가리 왕국의 초대 국왕에 올랐다. 이로써 헝가리는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에 속하게 되었다.

12세기부터 부다는 큰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상인들이 싣고 온 물건이 이곳을 거쳐 유럽 각지로 퍼져 갔다. 1265년 헝가리 수도가 되면서 부다엔 왕궁, 마차시 성당 등이 들어섰다. 마차시 성당은 마차시 1세를 기념한다. 그는 헝가리를 중부 유럽 최강국으로 키우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수용해 부다에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1490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오스만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400년 지배를 받는 동안 부다페스트는 먼지 덮인 시골 도시로 전락했다.

‘헝가리 혁명’ 170주년을 맞은 지난 2018년 3월 15일 헝가리 국기를 든 한 시민이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앞에 서 있는 모습. 연합뉴스
‘헝가리 혁명’ 170주년을 맞은 지난 2018년 3월 15일 헝가리 국기를 든 한 시민이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앞에 서 있는 모습. 연합뉴스

외세의 지배는 헝가리에 독립의 혼을 불어넣었다. 커진치 페렌츠는 언어개혁을 통해 고립된 지역어에 머물렀던 헝가리어를 문학과 학문의 표현이 가능한 고급어로 만들려 했다. 헝가리어는 핀-우그르어 계열의 소수 언어다. 한국어처럼 날짜를 연월일 순서로 쓰고, 인명도 성과 이름 순서로 표기한다. 헝가리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는 일상적 종말 의식을 일으켰다. 1784년 요제프 2세가 독일어를 쓰라고 명령하면서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혹독한 검열 속, 베세네이 죄르지는 ‘후녀디’(1772)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후녀디는 마차시 1세의 이름이다. “번영을 희망하는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언어의 완성이다.” 이에 호응해 사회 개혁을 이끈 것은 세체니 백작이다. 그는 1837년 국립극장을 짓고, 1849년 부다와 페스트를 잇는 현수교를 건설했다. 세체니 다리는 두 도시의 통합을 유도하고, 헝가리인의 민족적 열망을 자극했다.

1848년 헝가리 독립 혁명이 일어났다. ‘헝가리 민족극’으로 불리는 ‘반크 장군’의 커토너 요제프는 외쳤다. “내 조국, 내 조국, (중략) / 금빛 들판, 은빛 강물,/ 영웅의 피로 물들었고, 그들의 눈물로 홍수가 났지./ (중략) / 그대를 위해 나 용감히 죽으리, 그대 성스러운 마자르인의 조국이여!” 이 작품은 독일계 왕비의 폭정에 시달리던 13세기 초, 헝가리인들이 봉기해 왕비를 살해한 실제 역사를 소재로 했다. 페퇴피 샨도르는 이 공연을 보고 나오는 군중을 향해 ‘민족의 노래’를 낭송했다. “일어나라, 헝가리인들아, 조국이 부른다!/ (중략) / 노예인가, 자유인인가?/ 묻노니, 그대들 선택하라!”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형식으로 헝가리는 자치권을 얻었다. 이후, 부다페스트는 도약했다. 페스트 지역이 중심이었다. 국회의사당, 오페라하우스, 영웅 광장 등이 속속 들어섰고,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해서 유럽 대륙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됐다. 인구도 급증해 1873년 30만 명에서 1900년대 초엔 73만 명으로 늘었다. 인재들이 몰리면서 ‘헝가리 현상’이란 용어가 생길 정도로 학자와 예술가가 쏟아졌고, 카페 숫자가 약 600곳에 이르면서 파리나 빈과 맞먹을 정도로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누렸다. 부다의 네페시(Nepes·민족적인 것)와 페스트의 우르바노시(Urbanos·유럽적인 것)의 절충은 헝가리 문화의 한 특징이 됐다. 프란츠 리스트는 헝가리 민속 음악을 현대화했고, 모리츠 지그몬드, 마러이 샨도르, 코스톨라니 데죄 등은 상징주의, 표현주의, 사실주의, 정신분석 등 서구 문학을 수용해 헝가리 문학을 현대화했다.

그러나 벨 에포크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사라졌다. 추축국에 가담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했고, 헝가리는 영토와 인구 절반 이상을 내주면서 바다 없는 작은 나라가 되었다. 1944년 나치는 헝가리를 침공해,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부다페스트는 유대인 난민의 안전 피란처였기에 그 피해는 컸다.

‘운명’에서 케르테스 임레는 수용소로 끌려간 열네 살 소년의 눈을 통해 나치의 잔혹성을 폭로하고, 그 종말과 지옥의 세계에서 인간으로 남기 위해 간직했던 것들을 보여준다. “푸른 언덕 위를 지나가는 양털 구름은 보랏빛을 띠고 하늘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시선도 부드러워졌다. 이 시간대는 수용소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아무리 가혹한 삶일지라도 작은 희망을 즐길 자유를 막지 못한다.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없다. 그런데 만약 반대로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란 없다.”

1944년 12월 말,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포위하면서 도시 전체의 70%가 파괴됐다. 헝가리는 소련 위성국으로 전락했고, 스탈린식 전체주의가 들어와 반대자를 고문, 납치, 살해했다. 1956년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봉기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사상자 3000명, 망명자 25만 명의 기록을 남긴 채 부다페스트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피의 대가로 헝가리는 상대적 자유를 얻었다. 소련의 용인 아래, 헝가리 시민들은 비교적 자유를 누렸다. 문학에서도 서구적 형식 실험이 상당히 용인될 정도였다. ‘생산의 소설’에서 에스테르하지 페테르는 사회주의 선전 소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1989년 체제 전환 이후 부다페스트는 신자유주의의 폭풍에 휘말렸다. 도시는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사회 양극화와 공간 분화가 심해졌다. 이민자, 실업자, 집시, 노인 등은 빈민이 되어 슬럼에서 살아갔고, 상류층은 초현대적 시설이 들어선 폐쇄 주거지역에서 귀족처럼 살아갔다. 절망에 찬 민중은 카리스마 예언자인 오르반에게 표를 던졌다. 전체주의가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크러스너호르커이는 경고했다. “천국? 지옥? 피안? 다 헛소리야. 그렇게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야.”

출판평론가

■ 용어설명 - 헝가리 현상

헝가리는 현재까지 노벨상 수상자만 16명을 배출한 ‘노벨상 맛집’이다. 특히 188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노벨상 수상자 7명, 울프상 수상자 2명을 비롯한 수학자, 과학자, 예술가가 줄줄이 쏟아졌다. 현대 컴퓨터의 기초 원리를 정립한 존 폰 노이만, 핵분열 연쇄반응을 발견한 레오 실라르드,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 홀로그래피를 발견한 데니스 가보르 등 이들은 주로 유대계 이민자였다. 부다페스트의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문화가 이들을 헝가리로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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