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영이 만난 ‘세상의 식탁’ - 김장과 파사타 데이
날이 쌀쌀해지자, 어김없이 전국의 김장 축제를 알리는 소식이 들려온다. 예전에는 친척과 이웃들의 품앗이로 수백 포기의 배추를 절이던 풍경이 자연스러웠지만, 이제는 지방자치단체 축제나 체험행사를 통해야 김장의 계절을 체감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지중해 바다 건너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펼쳐진다. 다만 그들은 배추 대신 토마토를, 겨울의 문턱이 아닌 여름의 끝자락에서 맞이한다는 점이 다르다.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 이탈리아 가정마다 ‘파사타 데이(Passata Day)’가 시작된다. 겨울철 먹을 토마토소스를 준비하는 대작업이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려준 사람은 김치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탈리아 친구 소피아였다. 그녀에게 한국의 김장 문화를 알려주자 이탈리아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다며 놀라워했다. 그녀는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파사타 만들기를 하면 온 가족이 총출동하는 가족 이벤트였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각자 마트에서 사 먹어”라며 아쉬워했다. 어쩌면 이런 문화의 변천까지 한국과 닮았을까.
김장과 파사타, 언뜻 보면 한식과 이탈리아식의 거리가 느껴지지만, 사실 이 둘은 ‘세대를 잇는 저장의 기술’이라는 공통의 뿌리를 갖고 있다. 김장은 혹한을 대비한 ‘겨울 저장식’이고, 파사타는 긴 겨울 동안 먹을 소스를 만드는 ‘여름의 마무리 의식’이다. 제철 음식을 이용해 온 가족이 함께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
둘 다 제조 과정은 만만치 않다. 김장은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고춧가루·마늘·생강·젓갈을 섞는 오케스트라 같은 작업이다. 파사타 또한 토마토 껍질을 벗기고 씨를 걸러낸 뒤, 끓여서 병에 담고 다시 끓여 살균하는 장시간의 체력전이다. 그래서일까, 두 문화 모두 노동 뒤 식탁이 닮았다. 김장 끝엔 수육과 막걸리가 기다리고, 파사타 끝엔 파스타와 포도주가 기다린다. 이런 문화마저도 유사하다.
또한 두 문화 모두 공동체 단위의 식품 생산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가진다. 김장은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협동과 나눔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실제로 사회학 연구에 따르면, 김장을 함께한 이웃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상호 신뢰도가 높고, 세대 간 교류 빈도도 높다고 한다. 파사타도 다르지 않다. 이탈리아 가족들은 토마토 데이를 통해 ‘가족 유대의 재생산’을 경험한다. 식탁 위의 소스 한 병이 가족 공동체의 기억 저장소나 다름없다.
이런 문화는 비단 한국과 이탈리아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독일의 사워크라우트, 일본의 쓰케모노, 베트남의 느억맘 등 모두 저장과 발효, 그리고 ‘함께’의 정신이 스며 있다. 음식은 문화의 언어이고, 부엌은 그 나라의 철학이 깃든 공간이다.
문제는 이 아름다운 풍경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마트에는 공장 김치가, 이탈리아의 슈퍼에는 완제품 소스가 진열대를 채운다. 효율과 편리함이 공동체적 전통을 대체하는 시대, ‘함께 만드는 시간’은 효율성 앞에서 맥을 못 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집밥’과 ‘엄마 손맛’을 그리워한다. 그건 아마 음식의 맛보다 함께한 시간의 맛을 찾는 마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김장독이나 토마토 병 속엔 단지 배추나 소스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그 안엔 계절이 있고, 손의 기억이 있고, 함께 웃던 시간이 들어 있다. 어쩌면 그게 진짜 미식일지 모른다. 혀로 맛보는 게 아니라, 시간으로 숙성된 마음의 맛. 그 맛을 느끼려면 올해는 배추 몇 포기를 사야 할까.
서울대 웰니스융합센터 책임연구원
한 스푼 더시간이 만든 맛
두 전통은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원리지만, 두 방법 모두 결국 ‘시간이 만들어낸 맛’이다. 김장은 유산균이 배추 속 당분을 젖산으로 바꿔 산도를 높이고, 그 덕분에 부패를 일으키는 해로운 미생물의 성장을 막는다. 말하자면 ‘살려서 지킨다’는 자연스러운 발효의 과정이다. 반면 파사타는 토마토를 높은 온도로 살균해 미생물의 활동을 완전히 멈추게 하는, ‘멈춰서 보존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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