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 잠수함연구소장, 대한민국잠수함협회장
지난달 29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한국이 원자력 추진 잠수함(원잠)에 필요한 핵연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미국의 결단을 요청했다. 이튿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한국이 원잠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밝혔다. 이 발표는 한국의 원잠 논의가 구상 단계를 넘어 현실적 검토와 실행의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디젤 추진 잠수함과 원잠의 가장 큰 차이점은 ‘동력원’과 ‘잠항 능력’이다. 디젤잠수함은 연료와 공기가 필요한 디젤-전기 추진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잠항 시간이 제한적이다. 디젤잠수함과 달리 원잠은 핵반응으로 에너지를 얻어 수개월 간 수중 작전이 가능하며, 고속 기동성과 작전 범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다. 주변국의 잠수함 활동 감시, 전략적 억제력 확보, 장거리 작전 수행 등에서 원잠의 효용은 분명하다.
우리는 원잠 건조 기술을 이미 확보하고 있다. 3000t급 이상의 잠수함 건조 능력을 갖췄으며, 장보고-Ⅲ 배치(Batch)Ⅰ과 배치Ⅱ 사업을 통해 독자적인 잠수함 설계·건조·통합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한, 한국원자력연구원과 다수의 민간 기업은 소형모듈원자로(SMR) 기술을 꾸준히 개발해 왔다. 이는 원잠의 동력원으로 사용되는 소형 고밀도 원자로 기술과 유사한 기반 위에 있다. 따라서 핵연료만 확보된다면 기술적 측면에서의 제약은 크지 않다.
원잠 보유는 단순한 군사력 증강이 아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전략적 자율성과 기술 주권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원잠을 통해 확보되는 고밀도 원자로, 방사선 안전, 소재 및 제어기술 등은 원자력 산업 전반의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져 파급효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문이 열리면 비로소 그 안의 짐이 보인다. 버지니아급 원잠 한 척의 건조비는 손원일급 디젤잠수함 10척 건조 비용과 맞먹는다. 고가의 가격 이상에 상응하는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정치적·법적·기술적 과제 또한 산적해 있다. 미국 의회와 국방부의 승인 절차, 핵연료 공급 협정, 안전관리 법제 정비, 국내 핵연료 취급 인프라 구축 등 수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필라델피아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것은 미국 조선업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나라에는 국내 설비투자와 해외 건조가 병행되는 ‘이중투자’라는 부담으로 남는다. 더불어 중국과 러시아의 외교적 반발, 지역 안보 불안정 심화 등 외부 변수도 간과할 수 없다.
한국은 그동안 원잠 획득을 국가 실리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의 문제로 인식하기보다 강대국의 제약 속에서 ‘가질 수 없는 존재’로 여겨 왔다. 이는 종종 자존심과 감정의 문제로 흐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의 원잠 건조 승인으로 제도적 장벽이 상당 부분 해소된 만큼, 감정이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 위에서 실리를 극대화할 지혜가 필요하다. 원잠은 감정의 상징물이 아니라, 우리의 기술력과 판단력을 시험하는 국가적 과제다. 앞으로 남은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차분한 분석과 장기적인 안목, 그리고 실용적인 결단으로 이 난제를 풀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진정한 해양 강국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역량을 증명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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