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형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최근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을 방문해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 장을 우선 공급하겠다고 밝힌 이후 정부가 내세운 ‘인공지능(AI) 3대 강국’의 꿈에 다시 불이 켜졌다. 물론 GPU 확보는 중요한 인프라 투자지만, 진정한 경쟁력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그 위에서 새로운 알고리즘과 서비스를 만들어낼 핵심 인재에게 달렸다. 중국의 딥시크는 하드웨어 부족에도 불구하고 모델 최적화와 효율화 기술을 통해 세계적 성과를 냈다.
문제는, 우리의 인재 생태계가 그 지혜를 발휘할 구조가 아니라는 데 있다. 정부의 ‘인력 양성 사업’은 대개 초급 인력의 수를 맞추는 데 급급하다. 사업을 수행하는 대학이나 연구기관은 형식적인 실적 중심의 평가에 매달리며, 결과적으로 행정과 보고서 작성에 더 많은 인력이 투입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이렇게 낭비되는 오버헤드는 연구와 혁신을 위한 경쟁력을 갉아먹는다.
우리나라 교육 체계에도 문제가 있다. 초·중·고 교육은 여전히 ‘평균’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돼 있으며, 학생들은 ‘가성비’ 있게 공부하는 법을 일찍 배운다. 수능 선택과목도 학문적 호기심이나 적성이 아니라 ‘등급을 잘 받을 수 있는 과목’을 선호하고, 대학에서는 ‘취업률’이 평가기준이 돼 학점 인플레이션이 일상화한 지 오래다. 결국, 한 가지를 끝까지 파는 도전적인 학생이 손해를 보고, 탁월한 학생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할 유인을 잃게 된다.
반면, 미국은 공교육의 평균 수준이 낮다고 비판받지만, 그 안에서도 소수의 천재가 세계적 혁신을 만들어내며 국가 경쟁력을 유지한다. 이런 방식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우수 인재에 대한 집중 투자’가 국가의 기술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 역시 평등과 기회균등이라는 가치 속에서도, 뛰어난 인재에게 정당한 보상과 성장의 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
박사급 인력의 해외 빅테크 기업 진출을 ‘인재 유출’이라고 문제 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이 세계 무대에서 성장하는 것은 우리의 교육과 연구가 제 역할을 했다는 방증이다. 국외로의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국내 기업이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줘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정부가 외국 인재를 유치하겠다며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연구자들에게 몇 배의 연봉을 세금으로 내고, ‘국제 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적절한 반대급부 없이 막대한 연구비를 외국 기관에 보내는 사업 역시 국내 연구자들의 의욕을 떨어뜨린다. 결국, 우리나라의 우수한 인재들은 평가와 보상 체계의 불합리와 역차별 속에서 점점 더 ‘한국에서 연구하지 않을 이유’를 찾게 된다.
AI 3대 강국의 비전은 분명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국가적 과제지만, 이는 GPU나 자금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진정한 경쟁력은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 체계, 그리고 그들의 노력을 정당하게 인정하고 보상할 수 있는 유연한 제도에서 비롯된다. 평등과 공정 및 경쟁력이라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긴 어렵지만,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핵심 인재가 성장하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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