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집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펴낸 천선란 작가

 

‘좀비 바이러스’ 퍼져 아수라장

대부분은 다른 행성으로 이주

 

소외됐던 이들만 남게 된 지구

‘사랑하는 좀비’ 지키는 이야기

 

끝내 자신들만의 쉼터 찾아내

“되레 후련하게 느낄지 몰라요”

천선란 작가.  문호남 기자
천선란 작가. 문호남 기자

“‘좀비 세상’이 오면,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까요. 오히려 지금 당장 세상이 무너져도 별로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나를 환영해 주지 않는 세상에서 버티다가, 좀비 세상이 도래해서야 자신의 공간을 찾게 된, 외롭지만 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과학소설(SF) ‘천 개의 파랑’ 등으로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천선란(32) 작가가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집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허블)를 최근 펴내며 한 말이다. 책에는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2019)와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2020), ‘우리를 아십니까’(2025)가 3부작 형태로 담겨 있는데 모두 비슷한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아수라장이 된 세상, 다른 행성으로 대규모 이주하는 사람들, 좀비와 동식물만 남아 폐허가 된 지구다.

다만, 작품 속 몇몇 좀비들은 어딘지 조금 낯선 모습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끝내 해치지 않으려 애쓰는 좀비’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무차별로 물어뜯는 호러 영화 속 좀비와는 다르다.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 카페 허블에서 만난 작가는 “좀비 바이러스에 잠식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근원적인 감각은 남아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거나 체온을 느끼면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의 생존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좀비’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 스스로 움직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좀비와 그를 죽이지도 못한 채 지켜보고 있는 사람, 그것이 진정 우주에서 인간만 겪을 수 있는 고통스러운 재난이라고 생각했어요.”

작가는 그럼에도 이들에게 “무너진 세상, 변해버린 지구가 조금은 후련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좀비가 창궐해 세상이 폐허가 되고 소수의 생존자는 다른 행성으로 대거 이주했으므로, 남아 있는 세상은 ‘이들만의 세상’이다. 뒤집힌 세상에서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낼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견고하게 유지됐던 ‘정상 사회’에서 소외됐던 이들이다. 1부에는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노출된 채 어른이 된 남녀가, 2부에서는 휠체어를 탄 엄마와 그를 보살피는 딸이, 3부에서는 동성애 부부가 등장한다. 특히 2부는 작가 본인의 경험과 생각이 투영된 소설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휠체어를 타왔고 치매도 앓고 있어서 저희 가족은 이미 세상의 많은 것들을 이용하지 못하고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세상이 마비돼도 다른 탈출로를 더 잘 찾거나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그렇게 ‘정상성’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제일 오래 지구에서 살아남지 않을까 싶었어요.”

작품 속 두 인물은 끝끝내 서로를 놓지 않고, 멸망한 세상에서 자신들만의 쉴 곳을 찾아낸다. 이들이 찾아낸 안식처는 책 제목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다. “보통 사람들은 인맥을 넓힌다든가 집을 넓혀 간다든가 주변 영역을 계속 확장하려고 분주하잖아요. 그런데 어딘가에는 자신들을 위한 작은 공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물리적 공간이든 정신적 개념이든 간에요. 그리고 나중에는 그 공간들이 그들을 지켜주기도 하고요.”

작가가 이번에 선보인 3부작은 6년에 걸쳐 완성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언니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호러 영화를 볼 정도로 좀비물을 좋아했지만, 막상 제 소설의 소재로 쓰지 않았던 건 그 이상으로 좀비를 표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였어요. 그런데 소설을 써오다 보니 이제는 ‘나만이 쓸 수 있는 좀비가 있지 않을까’ 조금 자신이 생겼어요.” 앞서 2019년과 2020년 좀비를 소재로 한 두 단편을 발표했던 작가지만 “이번 책에 싣기 위해 기본 설정과 줄거리만 두고 전부 다 고쳐서 거의 새로 쓴 격이 됐다”고도 했다. 그렇게 오랜 고민 끝에 책을 써낸 작가는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쾌하고 가녀린 좀비’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번 소설은 외로운 느낌이 강했다면, 다음에는 좀비 시대가 한바탕 휩쓸고 간 후 사회가 회복해 가는 순간의 유쾌함을 담아낸 작품을 쓰고 싶어요.”

2019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천 개의 파랑’뿐 아니라 장편 ‘나인’, 소설집 ‘노랜드’와 ‘이끼숲’ 등을 펴냈다. ‘천 개의 파랑’으로는 미국 워너브러더스 픽처스와 영화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인지현 기자
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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