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워인터뷰
인터뷰 = 신보영 정치부장, 정리 = 이시영 기자
‘정의의 여신’은 양손에 각각 저울과 칼을 들고 있지만, 눈은 가리고 있다. 1977년 국내에 미 하버드대 철학과 교수였던 존 롤스의 ‘정의론’을 첫 번역·소개했던 황경식(78) 서울대 명예교수(명경의료재단 이사장)는 문화일보 파워인터뷰에서 눈을 가리는 것처럼 롤스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써야만 “정의를 논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이 생기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진다”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도 ‘무지의 베일’을 쓰고 정의를 논할 수 있을까. 황 명예교수는 “자연적 운(natural luck)과 사회적 운(social luck)이 공유자산이라는 것을 시민들이 수용하기 쉽지 않지만, 한국 사회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최근 정부 고위 인사들의 부동산 투기 논란을 언급하며 “과거와 달리 관료들이 사직하거나 사과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정의감과 공정지수가 만만치 않다는 증거”라고 했다.
롤스의 ‘정의론’을 “최소한의 양심에 대한 정의론”으로 규정한 황 명예교수는 롤스의 ‘숙고된 도덕 판단’, 즉 내면적인 도덕 자산인 양심과 도덕적 가책을 강조했다. 황 명예교수는 “양심이라도 있으면 대화가 되며, 그래야 무지의 베일을 쓰고 사회 구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면서 “우리 사회에도 이런 도덕적 자산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만큼, 이를 체화할 수 있는 덕(德)윤리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명경의료재단에서 진행됐다.
― 현대철학에서 정의에 대한 획기적 이론을 제시했던 1971년 존 롤스의 ‘정의론’이 나온 지 54년, 국내에 번역·발간된 지 48년이다.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먼저,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영향력이 지대했다. 학계에선 이를 ‘노머티브 턴(normative turn)’이라고 하는데, 20세기 초반만 해도 철학은 언어 분석에 심취해 있었다. 윤리학 역시 ‘선(善)이란 무엇인가’ ‘복지는 무엇인가’ 등 언어에 대한 정확한 규정을 하려고 애썼다. 이런 언어분석적 철학을 ‘메타 윤리’라고 하는데, 롤스의 ‘정의론’ 이후 ‘규범윤리’로 전환된다. 두 번째는 롤스 이후 정의론적 담론이 본격화됐고,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거리가 됐다. 롤스 이후에 생명의료 윤리적인 정의론과 국제적인 정의론 등 정의론 담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 롤스의 ‘정의론’을 이해 쉽게 설명한다면.
“먼저 자유주의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로버트 노직으로 대표되는 자유지상주의다. 또 다른 하나는 한 차원 높은 자유주의, 즉 사회적 규제 속에서 자유를 허용하는 롤스의 리버럴 자유주의(Liberalism)가 있다. 롤스는 ‘정의론’에서 정의의 첫 번째 원칙이 ‘평등한 자유’로,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나눠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는 ‘기회균등의 원칙’이고, 세 번째는 ‘최소 수혜자 최우선 고려’의 원칙이다. 요약하면, 자유방임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는 다 주지만 형식적 기회균등이며, 두 번째 복지국가식 자유주의는 ‘아빠 찬스’ 등을 함부로 못 쓰게 하는 실질적 기회균등이다. 롤스는 여기에 정의 개념을 덧붙여 공정한 기회균등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 롤스는 원천적 불평등을 설명하면서 ‘운(luck)’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운은 두 가지다. 하나는 타고난 운, 즉 자연운과 다른 하나는 사회운이 있다. 좋은 가정에 태어나 소위 ‘아빠 찬스’ ‘엄마 찬스’하는 이런 게 전부 사회운이다. 자유지상(방임)주의는 사회적 운도, 자연적 운도 완전히 개방된 상태로 남겨놓는데, 이게 개인적 능력주의 또는 실력주의다. 즉, 출세하면 모든 게 자기 것이다. 그러니 출세한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이다. 반면 자유주의는 사회적 운만 사회적으로 관리해 ‘아빠 찬스’를 함부로 못 쓰게 하는 것인데, 롤스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재능·지능 같은 자연운도 사회적인 공유자산으로 본다.”
― 인공지능(AI)도 공유자산인가.
“인류의 모든 자산은 공유자산이다. 지능과 재능, DNA도 공유자산이자 공공재다. 조상들로부터 온 것이며, 협동의 산물이다. 사회를 단순한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인류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유자산을 함께 관리하는 사회연대론(Social Solidarism) 시각으로 봐야 한다. 이건 도덕적인 요청이나 당위가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실질적 요구다. 그런 관점에서 AI 같은 기술도 혼자서 만들어낸 게 아니기 때문에 공유자산으로 보고 사회적 관리·통제하에 둬야 한다. 절대 어떤 개인이 독식해서는 안 된다. 합의에 의한 민주적 방식으로 관리해야 한다.”
― 한국은 롤스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나. 한국 사회는 지금 어디에 있나.
“한국에서는 교과 내용이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중·고교 교과서에 롤스의 정의론이 소개된다. 대학 입시에도 롤스의 정의론이 자주 나온다. 교사들이 끊임없이 내게 이메일을 보내서 ‘정의에 대해 이런 문제가 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온다. 아주 좋은 현상으로, 자라나는 2세들한테 정의론을 교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나.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자유방임에서 자유주의로 이행하는 중도에 있다. 부분적으로 복지가 논의되지만 아직 충분치 않으며, 아직도 개인주의적인 실력주의다.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원색적 이기주의지만, 서서히 롤스의 입장으로 가고 있다.”
“AI기술도 개인 재능도 공공자산… ‘무지의 베일’ 쓰고 세상 봐야”
출신배경·재산상태 모르는 것으로 가정하고
가장 불운한 계층이 될 각오로 선택한 것이 ‘정의’
인류의 모든 자산은 협동의 산물… 민주적 관리 필요
타고난 운도 개인의 것 아냐… 아빠찬스 함부로 쓰면 안돼
트럼프 정책, 도덕적 관점서 많은 오류
마가, 국가 이기주의로 보여… 결국 자충수 될 것
― 오히려 우리 사회가 퇴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표면적으로 후퇴되는 듯하지만 사실은 후퇴가 아니다. 부의 양극화 원인은 범세계적인 자유방임주의의 결과, 즉 ‘각자도생’의 결과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도덕적 자산이 성숙해가고 있다. 롤스는 ‘숙고된 도덕판단’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게 어느 정도 공유돼가고 있다.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양심이 내면적인 도덕적 자산이다.”
― 당장 고위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 등을 놓고 도덕성 논란이 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요즘에는 관료들이 고가 아파트 때문에 사표를 내거나 사과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양심의 가책, 도덕적인 가책 때문이다. 이들이 아파트를 2∼3채씩 갖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자유주의 때문이 아니다. 자유방임주의, 더 나아가 과거 때부터 시작해서 자연운과 사회운이 완전히 방치된 그 시대의 잔재다. 지금 시민들이 이런 문제에 추상같은 질타를 하는데, 이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사표를 내든지, 사과를 하든지 한다. 우리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 도덕적 자산이 조금씩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도덕적 가책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
―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원초적 입장 당사자로 합리적 인간을 상정했는데, 그 전제부터 틀린 게 아닌가.
“윤리학에서 ‘합리적 인간’이라고 했을 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이해타산과 자기이익을 계산하는 타산적 합리성(rationality)이다. 두 번째는 도덕적 합당성(reasonableness)으로, 넓은 의미의 합리성이다. ‘무지의 베일’을 쓰고 원초적인 입장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 도덕적 합당성 때문으로, 이런 단서라도 찾아내야 정의론이 우리 사회에 발붙인 실마리가 생긴다.”
― 도덕적 합당성을 좀 더 설명해달라.
“도덕적 합당성은 암암리에 축적되면서 성장하는 양심의 소리다. 미약하지만 내면에 잠재된 도덕적 자산, 이게 자유주의적 복지사회로 갈 수 있는 자산이다. 아직 한국 시민 의식 속에 도덕적 합당성이 공유되고 제대로 체화되지 못하고 있다. 체화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하다. 아직 체화되지 못했으니까 일부는 사과하더라도 립서비스에 가깝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 역사에 대해 너무 낙관적이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의 정의감을 분석해 보면 퇴행하고 있진 않다. 정의의 관점에서 중세, 근대, 현대를 관통하는 정의의 흐름은 암암리에 개선되고 진전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과거에는 정의와 공정의 원리가 하늘에서 정해준 천명이라 생각했겠지만, 오늘날은 정의와 공정의 기준이 관련 당사자나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약속에 의해 정해진다고 보고 있지 않나.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도 조선시대로부터 크게 발전했고 해방 직후보다 사회의 공정 및 정의지수가 크게 진전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래야 이 시점에서 롤스의 선진적 정의론을 배워야 할 논점과 문제가 무엇인지가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공정’은 과거 문재인 정부·윤석열 정부에서도 내세웠는데.
“공정이 시대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구호로 내세웠지만 실패했다. 우선 시민의식이 따라오지 못했고, 구체적 정책과 개혁 프로그램이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윤리 교육도 뒷받침하고 있지 못하다. 사회개혁의 전제조건이 의식 개조다. 시민들이 80%라도 공유해야 사회 개혁이 이뤄지는데 그게 안 돼 있는 것이다.”
― 공정에 대한 남녀·세대별 민감도 역시 큰 차이가 있다.
“롤스의 정의론에 대해선 먼저 여성주의와 여권주의자 반론이 굉장히 강하다. 남녀 차이가 제대로 고려되고 있느냐는 반론이다. 20대 남성은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이고, 여성은 임신과 육아 때문에 많은 부담을 느낀다. 또 한 가지는 기성세대와 젊은이들의 차이인데, 기성세대는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사회를 만들어온 공로와 동시에 희생이 있었다. 지금 젊은이들은 과거의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과실을 향유한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에 있다. 롤스의 ‘최소 수혜자’의 관점에서 남녀 간, 세대 간 갈등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더 연구해야 한다.”
― 한국의 교육·주거·의료는 정의로운가.
“교육은 아직도 정의론과 거리가 멀다. 사교육이 엄청나고, 있는 집 자식과 없는 집 자식이 천차만별이다. 주거에 있어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주거 불안정으로 인해 자존감이 훼손되고 있다. 사람이 자기 살 집이 없을 때 자존감이 가장 상한다. 롤스는 자존감이 인생을 살맛 나게 만들어 준다는 측면에서 자존감을 굉장히 중시한다. 의료는 한국사회가 비교적 안정돼 있는 편이다.”
― 롤스가 정의론을 탐색했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돼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추진하는 다양한 정책들은 도덕적 관점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듯하다. ‘자국 우선주의’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같은 구호는 국가 이기주의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리더십은 장기적으로 볼 때 미국에 이익을 주기 어렵다. 현재 많은 우방국들이 미국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같은 정책들이 미국에 자충수가 될 우려도 있는 듯하다.”
― 결국 롤스의 ‘정의론’ 구현을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한가.
“정의론이 제도적으로 반영되려면 사전적인 예비작업, 즉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달라져야 한다. 의식 개혁, 인식의 변화가 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의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 시민들은 아직도 자유방임, 능력주의, 출세주의에 깊이 몰입돼 있기 때문에 교육이 굉장히 중요하다.”
― 현실에서 개인이 이를 체화하기는 쉽지 않은데.
“결국 사람들의 실천의지를 단련하고 역량을 키워야 한다. 교육을 통해 자연운, 사회운들이 공유자산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널리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덕 윤리 형태의 교육이 필요한데, 최근 국민윤리 교육은 너무 국가주의적이다. 나는 국민윤리 교육을 덕윤리교육, 사회윤리교육 등으로 명명을 달리했으면 한다. 국민윤리는 우리 국민만 해당하기 때문으로, 나는 ‘12개 덕목 익히기’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가정윤리교육은 사랑·자비·친절·감사, 시민윤리교육은 관용·배려·절제·용기·자선·협동, 사회윤리교육은 정의·공정이다. 특히 한국 시민들은 배려·관용·협동·자선 등이 아직도 부족하다.”
― 치열한 경쟁에 지쳐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던지는 철학적 조언이 있을까.
“정의론을 읽어보면 그 속에 인생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특히 자존감이 굉장히 중요하다. 자존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한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자존심과 자존감을 좀 더 관련지어 연구할 필요가 있고, 이게 또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다.”
롤스 ‘정의론’ 국내 첫 번역, 삶에서의 ‘정의론 실현’ 노력… 철학책·고미술품 잇단 기증
■ 황 교수는 누구
황경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1971년 발간된 미국 하버드대의 존 롤스 교수의 ‘정의론’을 국내에 첫 번역·소개했다. 1977년 초판에는 스승이자 ‘철학계 거두’였던 우송 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가 서언을 썼다. 황 명예교수는 평생을 롤스의 ‘정의론’을 국내에 설파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덕(德)윤리와 인성교육을 강조해왔다.
“롤스의 정의론이 나의 정의론”이라고 일갈할 정도로 천착해온 황 명예교수는 삶에서도 ‘정의론’을 실현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올해로 30년을 맞은 명경의료재단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재단 산하 한방병원을 사회에 출연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재산뿐 아니라 재능, 더 나아가 자연적 운(natural luck)과 사회적 운(social luck) 역시 인류의 공유자산”이라는 철학 때문이다.
황 명예교수는 2021년 강원 원주시에 희귀 서양 철학도서 5070권을 기증했고, 지난 7월에는 고미술 작품 210점을 양구군에 기증했다. 기증 작품 중에는 대한민국민화전통문화재 제1호 송규태 작가가 제작한 책가도 8폭병,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우향(雨香) 또는 우형(雨馨) 임경수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우향신선도 10폭병 등이 포함됐다. 황 명예교수가 지난 30년간 수집한 고미술 작품은 총 1000여 점으로, 양구군과 홍천군을 포함해 4곳 지방자치단체에 순차적으로 기증할 예정이다.
△1947년 대구 출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서울대 철학 석·박사 △미 하버드대 철학과 대학원 객원연구원 △한국윤리학회장 △한국철학회장 △동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명경의료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 황 교수의 ‘사랑과 정의’
황경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의가 최소한의 사랑이라면, 사랑은 정의의 완성”이라고 했다. 황 명예교수는 “정의는 최소한의 사랑이며, 사랑은 정의를 능가하는 훨씬 더 큰 개념”이라면서 “친구의 술잔을 채우려면 넘치게 부어야 하듯이, 사랑이 넘쳐야 정의가 넘칠 수 있다”고 했다. 젊은 세대에게는 자존감을 강조하는 동시에, 행복과 덕행이 일치하는 ‘복덕일치(福德一致)’의 삶을 살기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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