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한국 경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재명(오른쪽)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한국 경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재명(오른쪽)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 과정에서 각국 정상들로부터 받은 고가 선물 내역이 잇따라 공개되며 미국 정치권이 술렁이고 있다. 금관 모형, 금 골프공, 전용기 제공설 등 이른바 ‘트럼프식 럭셔리’가 반영된 선물은 단순한 외교 의전을 넘어 외국 정부의 영향력 행사와 이해충돌 논란으로 번졌다. 과거 미국 대통령들의 선물 관행과 비교해도 이번 사안은 외교 선물이 상징에서 정치적 부담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트럼프 시대의 ‘과시형 선물 외교’=APEC 일정을 전후해 방한했을 때 신라 금관 모형을 제공받았고, 미·일 정상회담에서는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금박 골프공과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사용했던 골프채 세트를 건넨 것으로 전해졌다. 이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의 금관 장식품, 이스라엘의 황금색 호출기, 카타르 정부의 보잉 747기 제공 의사 표명 등 ‘럭셔리’ 품목이 이어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문제는 일부 고가 선물이 미국 법률에 따라 적절히 보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국 선물 및 훈장법’(Foreign Gifts and Decorations Act)은 외국 정부로부터 받은 선물이 정해진 ‘최소가치’를 넘을 경우 반드시 보고하고 연방정부 소유로 귀속시키도록 규정한다. 최소가치는 정기적으로 조정되며 최근 기준은 약 480달러(약 68만 원) 수준이다.

그러나 하원 감시위원회는 트럼프 행정부가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보낸 대형 초상화 등 일부 고가 선물을 신고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 측은 “절차에 따라 보고했고 일부는 기록 누락”이라고 해명했지만 의회와 언론의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특히 카타르의 보잉 747기 제공 의사 표명은 사실상 개인에게 항공기를 준다는 비판을 낳으며 법·윤리 논란을 키웠다.

지난달 28일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고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사용하던 퍼터와 금박 골프공을 선물하고 있다. X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일본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고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사용하던 퍼터와 금박 골프공을 선물하고 있다. X 로이터 연합뉴스

◇ 외교 선물의 역사: 상징성과 실용성의 교차=외교 선물은 트럼프 시대에 새로 생긴 관행이 아니다. 고대 제국은 금은보화를 주고받으며 동맹을 다졌고, 근대 이후에도 선물은 국력과 문화, 외교 전략을 표현하는 도구로 쓰였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외교 정상 간 주고받는 선물은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기술력과 문화적 자산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확대됐다. 미국은 1969년과 1972년 아폴로 임무에서 가져온 달 표본을 전 세계 135개국에 배포했다. 작은 암석이지만, ‘굿윌 록’으로 불린 이 선물은 미국의 과학기술력과 냉전기 동맹 외교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재치 있는 선물로 외교 현장을 유연하게 만든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서독 전 총리는 리처드 닉슨 미국 전 대통령에게 독일 맥주가 가득 실린 트럭을 보냈다. 맥주는 독일의 대표적 문화 상징이자 생활 풍습이었고, 냉전 동맹을 공고히 하는 시점에 보내진 상징적 선물이었다. 1977년 줄리어스 니에레레 탄자니아 대통령은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에게 땅콩 모양 목걸이를 선물했다. 농부 출신 카터 대통령의 별명인 ‘피넛 대통령’을 형상화한 선물로, 개인사를 존중하는 맞춤형 외교였다.

2006년 조지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은 ‘엘비스 마니아’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전 총리를 위해 프레슬리의 히트곡 25곡이 담긴 1954년식 주크박스를 선물했고, 고이즈미 총리는 자전거와 베이브 루스 기념우표 확대본을 답례로 건네며 양측의 선물은 스토리텔링이 있는 외교 장면으로 남았다. 2017년 아베 신조 일본 전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혼마 골드 드라이버를 건넸다. 당시 약 3700달러에 달하는 고가 골프채로, 골프광인 트럼프 대통령의 취향을 정밀하게 겨냥했다. 이후 두 정상은 플로리다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함께 골프를 치며 ‘브로맨스’를 과시하면서, 선물이 정치적 친밀감의 무대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선물외교의 의미 변화와 윤리 경계= 미 헌법 제1조 9항의 ‘에몰루먼츠 조항’(외국 이익 수수 금지 조항, Emoluments Clause)은 연방 공직자가 외국 정부로부터 금품이나 이익을 받지 못하도록 규정해 권력의 독립성과 투명성을 담보하고 있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외국 선물 및 훈장법’은 선물의 가치 평가와 보고·귀속 절차를 구체화하고, 백악관은 접수된 선물을 연방기록청 등과 연계해 매년 공개 목록으로 관리한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일부 선물의 기록 누락, 행정 착오 처리, 개인 자택이나 리조트 보관 정황 등이 지적됐다. 이는 공직자 윤리의 기본을 흔든다는 비판과 함께, 대통령이 외국 정부로부터 물질적 영향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증폭시켰다. 트럼프 대통령 지지층은 “개인 스타일을 문제 삼는 과도한 정치공세”라며 반발하고 있지만, “대통령이 공적 지위에서 받은 선물은 개인 취향이 아니라 공적 윤리의 문제”라는 비판 여론도 거세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 이후 선물의 의미가 국가 간 우호 상징에서 개인적 관계·이미지 연출의 도구로 변질됐다고 분석한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선물이 정치적 부담과 이해 충돌 가능성까지 동반하게 됐다”고 전했다.

정지연 기자
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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