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논설위원
금관 쓴 트럼프 영상과 밈 정치
APEC RM 지디 제치고 뷰 폭발
나쁜 뉴스도 많으면 중요 인물
한국 정치 쇼트폼 영상 격전지
밈 정치 낳은 낙제점 국정감사
플랫폼 유튜버 책임도 따져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전후로 세계를 휩쓴 이미지는 단연 ‘금관 쓴 트럼프’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선물 받은 신라 금관 모형을 지그시 바라보는 장면은 순식간에 미국 온라인 트렌드 1위에 올랐다. 이후 ‘멜라니아와 춤추는 금관 트럼프’ 영상을 비롯해 각종 AI 합성 영상과 패러디 이미지가 X(옛 트위터),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글로벌 플랫폼을 달궜다.
특히, 미국 전역에서 700여만 명이 참여한 ‘No Kings(왕은 없다)’ 시위 직후에 ‘트럼프가 진짜 왕관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 절묘한 타이밍 덕분에 왕관 쓴 트럼프 밈은 폭발했다. APEC 의제와 미·중 회담, 관세 협상 등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재명 대통령은 물론, 6000만 팬덤 아미를 거느린 방탄소년단의 RM, 각국 정상들로 하여금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들게 만든 지드래곤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았다. 트럼프의 왕관 밈은 전세계에서 수백만∼수천만 뷰를 기록한 반면, 지드래곤 공연과 RM 연설은 수만∼수십만 뷰였다.
미국의 기술문화 잡지 와이어드(WIRED)는 “이미지와 감정을 자극하는 밈이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주류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며 트럼프를 ‘최초의 AI 슬롭 대통령’이라 칭했다. 대량 생성되는 조악한 AI 콘텐츠를 정치 도구로 활용한 첫 대통령이라는 의미다. 쇼츠, 유행 문구, 패러디물, AI 슬롭까지 포괄하는 ‘밈’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 확산되면서 권력을 만들고 현실을 재구성하는 전형적인 ‘밈 정치’이다.
미국 정치평론가 에즈라 클라인은 저서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에서 트럼프 당선을 “노출 빈도의 결과”로 분석한 바 있다. 뉴스와 SNS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일수록,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저녁 CNN 뉴스에서 78%의 보도 비중을 차지했고, 상당수가 비판적 보도였지만 오히려 ‘주목받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왕관 밈’ 역시 이 분석이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을 보여준다. 이 밈들이 아무리 비판적이고 풍자적이라 해도, 그 자체로 트럼프의 존재감을 높이고 지지층에는 ‘세계가 두려워하는 강력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미디어의 속성과 작동 방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온 대표적 정치인 트럼프 대통령은 번쩍이는 왕관만큼이나 왕관이 만들어낸 ‘온라인 열기’에 더 만족했을지 모른다.
밈 정치는 우리 국정감사장에도 넘쳐났다. 카메라를 의식한 퍼포먼스, 논란을 자극하는 발언과 제스처, SNS 업로드와 인기 유튜버 출연 경쟁이 일상이 됐다. 실시간 영상과 쇼트폼 생산기지가 된 국감은 조희대 대법원장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빗댄 ‘조요토미 희대요시’ 피켓을 든 최혁진 의원의 ‘AI 슬롭’ 정치에서 시작해 최민희 과방위원장 밈으로 정점을 찍었다. 국감 기간 딸 결혼식, 양자역학 공부 해명, 축의금 메시지 논란은 모두 패러디, 쇼츠, AI 영상으로 소비됐다. 여당 내에서도 싸늘한 반응으로 결과적으로 ‘나쁜 유명세’가 됐지만 모든 뉴스를 집어삼킨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맥락만 잘 맞으면 다음엔 ‘운 좋은 최민희’가 나올 수 있다. 아마 나올 것이다.
문제는 밈 정치와 자극적·악의적 콘텐츠 범람에 대한 진단은 쉽지만, 대책 마련은 어렵다는 점이다. 정치, 사회, 미디어, 유권자 등 각 주체가 얽혀 있는 만큼 단일 해법이 있을 수 없다. 국감 제도의 근본 개선을 포함해 정치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악의적 콘텐츠를 생산·유통하는 유튜버와 플랫폼에 대한 실질적 대응책 마련이다. 글로벌 플랫폼은 법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반드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유튜버, 크리에이터, 플랫폼 운영자에게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주목된다.
표현의 자유 침해, 정치적 편향의 우려와 위험을 피하면서 실효성 있는 규제가 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허사인 줄 알면서도 정치인에게 품위를 요청하면서 밈정치를 대하는 그 첫 원칙을 되새겨 본다. ‘자주 보이는 정치인=좋은 정치인’이라는 착각은 밈 정치가 만들어낸 가장 위험한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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