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작가

 

영화 ‘홍반장’ 의 주인공처럼

난 대학 시절부터 만능 해결사

 

최근 한 언론인의 대국민 제안

‘전 국민 자서전 쓰기’에 솔깃

 

국가적 경험 자산 축적 외에

‘나를 돌아보는 기회’ 기대돼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라는 긴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2004년에 개봉한 코미디물인데, 이후 만물박사처럼 척척 해결해주는 사람을 ‘홍반장’이라고 불렀다. 대학 시절 동기들은 지각 입학한 나를 기댈 만한 언덕으로 생각했던지 내 뜻과 상관없이 홍반장 역할을 맡겼다.

동기들이 1박 2일로 놀러 갈 때면 나랑 간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청춘을 즐기랴 공부하랴 바쁜 동기들과 달리 ‘음주가무’를 즐기고 대학에 입학한 나는 때마다 장학금을 쏠쏠하게 챙겼다. 동기들은 그런 나를 엄마에게 과대 포장해서 소개하고 적절할 때 ‘팔아먹은’ 것이다. 힘 안 들이고 해치운 홍반장 역할도 있지만, 때론 곤란한 미션이 떨어지기도 했다. ‘원서강독’ 시험을 늦춰 달라는 동기들의 성화에 교수님께 전화 드려서 세 차례나 시험을 지연시킨 일도 있었다. 마지막엔 역정을 내셨지만, 온몸으로 사수해 동기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졸업하고도 나를 홍반장으로 여기는 이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홍반장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하소연을 들어주는 일이다. 동년배에게 하기 힘든 얘기를 나한테 술술 털어놓는 동기가 많아 하루해가 다 간 적도 있다.

‘아저씨’로 불렸던 나이 많은 남자 동기들에게도 나는 만만한 홍반장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의 습작품으로 합평할 때면 현역 여자 동기들은 “아저씨의 소설은…”이라며 포문을 연다. 교수님이 “쟤가 아저씨면 나는 할아버지냐”라고 퉁바리를 줬지만 끝내 오빠로 불리지 못한 그들. 어여쁜 여자 동기들로부터 외면받자 수시로 나를 술자리에 불러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자 급기야 ‘○○이 등단했다. 축하하자’라는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동기들이 회사 일로, 가정을 꾸미느라 바빠지면서 나의 홍반장 임무도 끝이 났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도 수시로 내게 뭔가를 묻는 전화를 꾸준히 했다. 사람을 구해 달라, 출판사를 소개해 달라, 기고할 데를 찾아 달라, 나를 취재해 달라 등등 다양한 사안이 있었다. 그동안 받은 질문 중에 가장 많은 것은 ‘소설 쓰고 싶다’ ‘책 내고 싶다’는 바람이다. 책 가운데 하나가 ‘자서전’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최근에는 헤드헌터로 일하는 후배가 ‘자서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 사업 파트에 넣어 볼까 한다’며 다양한 질문을 해와 거의 두 시간 동안 전화를 한 일도 있다.

한 언론인이 ‘경험 자산’을 축적하자는 의미에서 대통령에게 ‘전 국민 자서전 쓰기 운동’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시작하면 분명 많은 사람이 응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체감하기로 자서전뿐만 아니라 내 책을 갖고 싶은 사람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

자서전 내고 싶다는 분을 만나면 어렵게 생각지 말고 전체 구상을 한 다음 한 편씩 에세이 형식으로 써서 스토리를 모으라고 권하며 관련 강의도 소개한다. 잊을 만하면 전화해서 자서전 얘기를 하는 분도 있다. 글을 얼마나 썼느냐고 물으면 “바빠서 못 썼는데 곧 써야지”라고 한 지 벌써 10년이다.

자서전에 관한 문의를 받을 때마다 나는 평생 자서전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없는 데다 평생 마감에 시달리며 살아왔는데 내 이야기까지 쓰면서 골머리 앓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요즘 자서전을 쓰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뒤늦게 상담 공부를 시작했는데 과제의 공통점이 ‘나에 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인간관계, 의미 있는 영향을 주었던 순간, 어떤 삶의 여정을 겪었는지를 상담심리학 이론과 연결해 서술하라는 과제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나온 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날을 한 줄로 요약해 보니 ‘된맛을 못 본 인생’이었다. 가정에서 받은 상처가 마음 병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상처받은 기억이 없는 데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직장 스트레스도 없어 그런 문장이 나온 것이다.

게다가 ‘성취’에 대한 갈망이 빚어낸 스트레스조차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가 권한 새벽기도로 다 풀어내 버려서 남아 있는 앙금이 없었다. 친구의 유언이라고 생각해서 야행성이었던 내가 사투를 벌이며 새벽형 인간으로 변신했고, 2007년부터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를 실천해 얻은 성과였다.

다만, 상담 과제는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내가 심리유형론상 E성향(외향형)의 활발한 성격이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매우 수동적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전학과 대학 진학으로, 두 번에 걸쳐 나의 인간관계가 공중분해 되는 과정을 겪으며 나도 모르게 ‘관계’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게 원인인 듯하다. 또한, ‘나이 많은 후배’와 ‘프리랜서’라는 후천적 정체성이 나를 수동적으로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섭섭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만남에 좀 더 정성을 기울이기로 마음먹었다.

원로 언론인이 주창하신 전 국민 자서전 쓰기는 국가적 경험 자산 축적뿐 아니라, 개인에겐 ‘나를 돌아보는 기회’도 되는 만큼 꼭 실행되면 좋겠다. 좀 더 한가해지면 나에게 ‘글쓰기’를 문의했던 이들을 줌으로 만나 알량한 노하우나마 전하는 홍반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근미 작가
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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