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논설위원
우리가 일상에서 가끔 듣는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격언은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전을 수습하고 팍스 로마나의 기틀을 세운 그는 라틴어 ‘festina(서두르다)’와 ‘lente(천천히)’를 결합한 Festina Lente를 인생의 좌우명이자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신중하면서도 민첩하게 움직이라’는 의미로 올바른 판단과 타이밍, 신중한 속도의 미덕을 강조한다. 그의 전기에는 ‘천천히 서둘러라, 용맹보다 침착이 낫다’는 표현도 나온다.
이 역설적 금언은 인류 최초의 근대 출판인 알도 마누치오(1449∼1515)로 이어진다. 16세기 최대 출판도시 베네치아에서 ‘출판계의 미켈란젤로’로 불린 그의 출판사 모토도 ‘Festina Lente’였다. 엠블럼 역시 닻(신중함)을 감싼 돌고래(속도) 모양이다.
올해 한·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맞아 ‘천천히 서둘러라: 알도 마누치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출판인’ 전시가 인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마누치오 출판사가 만든 ‘지리학’(1482), ‘라틴어 문법’(1493), ‘폴리필로의 꿈’(1499), ‘데카메론’(1522) 등 베네치아 국립마르차나도서관, 로마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본 53종이 전시된다. 그는 출판 역사에서 처음으로 휴대용 문고판을 만들어 독서를 학문·종교 목적이 아닌 여가와 즐거움의 영역으로 넓혔고, 필기체·악센트·세미콜론·아포스트로피 등을 도입해 유럽 인쇄문화를 혁신했다.
그는 의뢰받은 원고를 단순히 찍어내던 당대 인쇄업자들과 달리 내용을 보고 출간을 결정한 기획자이자 철저한 교정과 편집으로 오류 없는 책을 만든 편집자였다. 그가 출판을 시작한 이유도 당시 책의 오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높은 명성에 르네상스 유럽의 지식인들은 먼 길을 마다 않고 그의 출판사를 찾았다. ‘Festina Lente’의 결과였다.
인공지능(AI)이 불러온 가속의 시대, 조급함이 일상을 지배한다. 국민 74%가 1년 새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했다는 조사도 있다. 뒤처질까 걱정하는 조급함이 우리를 더 깊은 불안으로 내몰 때, 아우구스투스에서 마누치오로 이어지는 좌우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천천히 서둘러라. 서두르더라도 멈춰서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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