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회의 뒤집어보는 상식

‘삼고초려(三顧草廬).’ 유비(그림)가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 인재로 맞이한 이야기는 진정성과 인내의 상징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삼국지의 유비는 위로는 조조, 아래로는 손권과 천하를 다투고 있었다.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준 인물이 바로 제갈량이다. 당시 제갈량은 와룡(臥龍)이라 불리며 세상과는 거리를 둔 은자였다. 유비는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듣고 감탄한 나머지, 세 번이나 그의 초가집을 찾아가 마침내 스승으로 삼았다.

그런데 삼고초려는 유비가 처음이 아니다. 유비 이전에도, 인재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낮춘 군주들은 많았다. ‘세 번 찾아간다(三顧)’는 행위는 이미 중국 고대부터 존재하던 인재 존중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는 유비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기록이 나온다. 동한의 광무제가 명사(名士) 엄광을 세 번 찾아가 벗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광무제는 황제가 된 뒤에도 옛 친구를 잊지 않고 직접 찾아가 함께 강가에서 낚시를 즐기며 옛정을 나누었다. 훗날 문인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삼고의 예(三顧之禮)’라 칭했는데, 이는 유비의 삼고초려보다 수십 년 앞선 사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춘추전국시대에도 군주가 현인을 맞이하기 위해 여러 차례 찾아가는 풍속이 있었다. 제나라 환공은 관중을 얻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고, 초나라 장왕은 굴원을 신임하기 전 여러 번 그를 찾아 의견을 구했다. 또 진나라 효공은 상앙을 초빙할 때 세 번이나 사자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삼고초려의 정신은 ‘군주가 인재를 예로써 구한다’는 중국 정치문화의 핵심 가치였던 것이다. 삼고초려가 유비의 전유물처럼 기억된 이유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극적 서사 때문이다. 나관중은 이 이야기를 통해 유비의 인간적 면모와 제갈량의 덕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유비는 고대의 ‘삼고의 예’를 충실히 실천한 후대의 모범적 군주였던 셈이다.

도서관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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