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미국 하원의장을 두 차례나 지낸 민주당의 살아 있는 전설 낸시 펠로시(85) 의원이 지난 6일 SNS를 통해 내년 중간선거 불출마 선언을 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직접 “악마 같은 여성이 은퇴하게 되어 기쁘다”며 환영 입장을 밝혔다. 사적으로는 악연이더라도 대통령이라면 공식적으로나마 너그러운 평가를 할 만한데도 트럼프는 미 권력 서열 3위였던 펠로시의 정계 은퇴 발표에 악담을 퍼붓는 협량함을 보였다. 펠로시가 지난 3일 CNN 인터뷰 때 트럼프에 대해 “지구상 최악의 존재” “추악한 생물”이라고 비난한 데 대한 앙갚음으로 보인다.

트럼프와 펠로시는 워싱턴 정계의 보기 드문 네메시스다. 펠로시는 당초 두 차례에 걸쳐 정계 은퇴를 검토했으나 트럼프 때문에 뜻을 접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든든한 우군이었던 펠로시는 오바마 퇴임 때 함께 물러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트럼프가 당선되자 마음을 바꿨다. 2019년 다시 하원의장이 된 뒤엔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였다. 트럼프의 2020년 상하원 국정연설 때엔 연설문을 찢어버리는 퍼포먼스까지 벌였는데 그 저주가 통했는지 트럼프는 대선에 패배하며 퇴장했다. 이후 펠로시는 2차 은퇴 준비에 들어갔으나 트럼프 바람이 심상치 않자 접었다. 80대 노장 펠로시의 정치를 지속시킨 힘은 숙적(宿敵) 트럼프인 셈이다.

펠로시는 지난해 12월 미 의회 대표단과 룩셈부르크를 방문 중 계단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 수술을 받았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하이힐과 정장 차림을 고수했던 펠로시의 건강은 이후 무너졌고, 은퇴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1기 때보다 더 거침없이 미국의 법치주의를 무시하면서 의회 및 사법부와 싸우고 있어 어느 때보다도 펠로시 같은 열혈 전사가 필요한 국면이지만, 세월 앞에선 철의 여인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지난 4일 선거에서 민주당이 뉴욕 시장, 뉴저지·버지니아 주지사를 석권한 뒤 곳곳에서 ‘트럼프 피로증’이 감지된다. 펠로시가 이 시점에 은퇴를 발표한 배경엔 트럼프 권력이 정점을 지나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듯하다. 펠로시의 은퇴 결정이 트럼프 시대가 저물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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