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 타이드, 사상의 썰물과 밀물 - (1) 탈진실과 파시즘
‘개소리’가 돈이 되고 표가 되는 세상
집단 관심 끌 수 있다면 거리낌없이 거짓 유포
기존 언론의 팩트체크는 역부족으로 보여
그래도 ‘끝없는 실패’가 ‘상식 회복’ 향한 출발점
세상에는 다양한 민족과 역사, 종교와 인종만큼이나 수많은 주의와 이념, 집단행동이 탄생과 소멸을 거듭해왔다. 인간의 기본권과 참정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사상의 흐름은 사고와 가치를 담아 진화했다. 인공지능(AI)의 시대에도 이런 거대한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탈(脫)진실과 페이크, 삼권분립과 국민주권, PC주의 등 최근 세계를 움직이는 사조(思潮)의 실태와 양상을 문화일보 기자들이 추적한다.
◇탈진실, 종말적 시대상
국경과 언어, 인종을 초월해 인간의 본질을 써내려간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 노벨문학상이다. 지난해 오랜 시간 집단의 폭력과 인간의 내면을 응시해온 소설가 한강의 호명, 올해 묵시록적 공포의 한가운데에서 예술의 힘을 다시금 확신하게 만든 헝가리 소설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선정.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은 미학의 판단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먼저 감지했다. 문학이 가진 통찰의 증명이었다.
“묵시록적 공포의 한가운데에서 예술의 힘을 다시금 확신하게 하는, 강렬하고도 예언적인 작품 세계.”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문학상 올해의 수상자로 헝가리의 소설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선정하며 그 이유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묵시록적 공포란 곧 세계의 종말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수상자 호명 직후 “지금 세상의 상태를 생각하면 너무 슬프다”며 “그것이 나의 깊은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결국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과 슬픔은 그의 작품 전반에 깊이 깃들어 있다.
그의 데뷔작 ‘사탄 탱고’(1985년 출간)의 배경은 공산정권 치하 1980년대 헝가리의 집단농장이 해체된 마을이다. ‘종소리’와 ‘쥐 소리’, 심지어 ‘개 짖는 소리’ 등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주민들은 크게 동요한다. 구원의 소리를 기다리지만 들리지 않는다. 총 12개인 ‘사탄 탱고’의 각 장은 40쪽가량의 단 한 문단으로 이뤄져 있다. 끝없는 소문과 추측, 의심들이 문장 부호 없이 쏟아지며 독자는 무엇이 사실이고, 아닌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정보 과잉 속에서 진실이 희석되는 오늘날의 모습 그대로다. ‘저항의 멜랑콜리’(1992년)에 나오는 마을 역시 소문의 광기가 휩쓴다. 소문을 믿는 사람들로 가득한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끝내 파국을 맞는다. 한림원이 꺼내놓은 지금의 시대상인 탈진실과 극단주의, 파멸에 대한 선험적 예측이다.
◇‘개소리’, 왜 만연하는가
진실을 알아보기 어렵게 만드는 것. 크러스너호르커이 식으로 말하면 ‘정체불명의 소리’이며 한국인들에겐 ‘가짜 뉴스’라는 이름으로 더욱 익숙한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2016년 올해의 단어는 ‘탈진실’(Post-truth)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을 전후해 각종 음모론이 쏟아지면서 용어의 사용이 크게 확산됐다. 이후 한국에서도 가짜 뉴스에 대한 정의가 새롭게 이뤄진다. 2017년 2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은 가짜뉴스를 “허위 정보를 전달해 경제적·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전략적이고 기만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규정하며 보도의 포괄적 실수를 의미하는 오보를 오인, 루머, 풍자 등과 구별했다.
탈진실은 반진실(anti-truth)과는 다르다. 단순히 거짓을 믿게 만드는 차원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미국의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저서 ‘포스트 트루스’ ‘누가 진실을 전복하려 하는가’ 등에서 “탈진실이란 거짓이 난무하는 상황을 통해 자유로운 진실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의 사기를 꺾고, 진실 파악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이때 사용되는 가짜 뉴스도 단순 거짓말이 아니다. 해리 G 프랭크퍼트 프린스턴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저서 ‘개소리에 대하여’를 통해 이를 ‘개소리’(bullshit)로 규정한다. 거짓말쟁이는 진실을 감추려 하지만 개소리쟁이는 자신이 진실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려 한다고 말한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나, 개소리하는 사람은 그저 사람들의 관심을 수없이 돌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세상에 만연하는 것인가. 개소리는 돈이 되고 표가 되며,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왜 개소리가 돈이 되는가’이다. 영국의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에서 2019년 ‘세계 50대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꼽은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저서 ‘바른 마음’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사랑이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다는 통념에 반론을 제기한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편향적 사랑이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이라는 주장이다. 즉 ‘군집’을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정보는 자연스럽게 진실보다 선호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는 언론 산업의 구조 변화와 맞물리며 개소리의 생산을 가속화한다. 정은령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는 “언론이 시민들의 주목을 얻기 위해 소셜 미디어와 무궁무진한 콘텐츠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클릭 수는 이윤 창출의 잣대가 되며, 더 많은 개소리가 더욱 신속히 세상에 나오게 된다”고 설명한다.
◇실패의 반복은 상식의 회복 출발점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 통치의 이상적인 신민은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을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탈진실이 곧 파시즘의 초석인 것이다.
이처럼 엄중한 상황에서 끊임없는 진실의 추구가 언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레거시 미디어 특히 신문산업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교수는 “만성적 과로에 시달리는 기자들은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는데 동원하고 투입할 자원은 부족하다”며 “언론사 역시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강하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절망의 끝은 희망의 시작과 맞닿아 있는 법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와 하이트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시한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세계는 계속된다’(2013년)를 통해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의 결과가 실패뿐이라 해도, 그 실패를 끝없이 반복하는 방식으로 종말을 무한히 지연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하이트는 더 구체적인 처방을 내놓는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넘쳐나는 가상의 세계에서 서로 다른 생각들을 다시 현실로 소환해, 직접 부딪히며 답을 찾아가자고 제안한다. 알고리즘의 수렁에서 벗어나 언론 스스로 불편한 대화를 시작하는 것. 그것은 결국 크러스너호르커이가 말한 지루한 실패의 반복과 다르지 않다.
희망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답이 정해진 미증명 확신을 유통하는 것보다 끝없는 검증을 통해 앞으로 전진해야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상식이 회복돼야 한다. 그 지루한 반복 속으로 용감하게 다시 들어가는 것, 절망의 끝은 언제나 희망의 시작과 맞닿아 있는 법이다.
19대 대선때 출범… 가짜뉴스에 맞선 ‘8년의 실험’
■ 서울대학교 팩트체크센터
탈진실에 맞서는 하나의 시도가 있었다. 해외에서 ‘가짜 뉴스’가 사회 문제로 대두하자 기사의 진위 여부는 물론 전후 사정, 맥락까지 확인하는 ‘팩트체크 저널리즘’이 부상했고 각 언론사 안팎에서 ‘팩트체커’들이 활동을 이어왔다. 한국에서도 2017년 제19대 대선을 기점으로 팩트체크 저널리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으며, 2017년 3월 국내 최초의 팩트체크 플랫폼 ‘SNU팩트체크센터’가 출범했다. 센터는 제휴 언론사들의 팩트체크 기사를 모으고, 인턴십과 시상식, 국제행사를 운영했다. 센터는 지난해 8월 무기한 휴지기에 들어갔다. 8년간의 실험이 마무리 수순을 밟는다는 점은 아쉬우나 팩트체크 저널리즘의 한계 또한 드러났다. 먼저 반박과 정정보도가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가의 문제다. 레온 페스팅거 등은 저서 ‘예언이 끝났을 때’를 통해 예언이 거짓으로 판명되어도 믿음은 흔들리지 않거나 오히려 가짜 정보가 더 거세게 퍼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장상민 기자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1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