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사회 전반에서 지탄받는 갑질

정치권에선 전방위 퇴행 행태

일상화한 공무원 윽박지르기

 

선거지상주의는 20세기 유물

이젠 권력 절제와 다양성 중요

정치와 행정 균형 중요한 시대

갑질은 지탄의 대상이다. 회사·학교·공공단체는 물론 가정에서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또는 ‘칼자루 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갑질 낙인이 찍혀 사회에서 매장당할 수 있다. 갑질에 붙은 부정적 인식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탈권위주의화하고 문명화한 덕이다. 갑은 을의 마음을 헤아려 공감(empathy)의 덕을 쌓아야 하는 문명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유독 여야 정치인들은 이 좋은 변화에서 열외로 있다. 자기를 직접 돕는 보좌진이나 당료는 업무 성격상 그러려니 차치해도, 독립 기관에서 중립성을 표방하는 공무원들에 대한 갑질이 과도하다. 행정부나 입법부 공무원을 시종(侍從)처럼 닦달하고 무리한 지시를 내릴 때 과연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고려하는지 의심이 든다. 그 공무원들은 공적 절차를 거쳐 임명됐고, 중립성·전문성·지속성·보편성·체계성 등 나름의 대원칙을 지켜야 한다. 정치권과는 다른 논리로 움직이는 이 행정 영역의 공무원들을 대통령·장관·국회의원 등 정치권 인사들이 영혼 없는 부하처럼 막 대할 때 갑질이란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국회의원의 갑질은 특히 눈에 잘 띈다. 국정감사·국정조사·업무보고와 예·결산심의, 대정부질문 등에서 공무원들을 일방적으로 윽박지르고 답변 기회도 잘 주지 않는 모습은 TV나 인터넷에 자주 등장한다. 이렇게 명확히 공개되진 않지만, 국회의원들은 과도한 자료를 단시일에 제출하라거나 시도 때도 없이 회의에 불러내는 등으로도 행정부·입법부 공무원을 괴롭히곤 한다.

대통령과 정무직 장관이 공무원에게 가하는 갑질은 더욱 은밀하고 더 심각하다. 정파성이 심해 국민에게 부당하게 비칠 수 있는 지시를 공식이나 비공식 경로로 받을 때 공무원은 난감하다. 직제상 상급자의 지시를 거부하자니 당장의 불이익이 두렵고, 맹종하자니 후환이 두렵다. 이때 공무원들의 마음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헌법 조문과 상급자에 대한 존중·충성이라는 규범이 충돌하며 큰 고민을 자아낼 것이다. 느닷없이 계엄 명령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아 고민했을, 그리고 실제로 처벌 위기에 처한 군인·경찰·공무원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갑질 대상이 됐고 피해를 떠안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관련돼 정치적 파장이 큰 사건을 맡는 검사들도 최고위층으로부터 정파성 짙은 요구를 받는다면 역시 정치적 갑질의 대상이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정치인들이 행정 영역에 가하는 갑질은 ‘선거에서 국민의 신임을 받은 우리가 국정 운영의 정통성 있는 주역으로서 공무원을 이끄는 건 당연하다’라는 자부심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시대착오적인 자아도취이다. 민주주의를 선거지상주의 관점에서 단순하게 이해했던 과거에는 선거직 정치인이 국정의 중심에서 임명직 공무원을 진두지휘하는 게 당연했다. 정치인이 엔진이라면 공무원은 그 동력을 전달하는 컨베이어벨트로 비유됐다. 이런 정치 우위론은 특히, 자유선거와 자유투표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규정한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 모델이 대세로 퍼졌던 20세기 중후반에 널리 받들어졌다.

그러나 요즘 민주주의는 선거지상주의를 벗어나 복잡하고 다면적인 모습으로 진화했다. 자유선거와 자유투표는 여전히 중요하나 국정 운영상 절차적 공정성, 소수의 포용, 이익 표출의 자유, 다원주의적 조화와 균형, 공동체주의적 참여와 숙의, 개인의 근원적 존엄성, 시민적 주체성, 국가권력의 절제 등 여러 가치·덕목이 종합적·혼합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또한, 정부와 시장과 시민사회의 수많은 세력·집단이 맞물려 움직이는 거버넌스 개념도 주목받고 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선 더는 정치 우위론이 적실성을 내세울 수 없다.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논리로 자기 역할을 맡는 독립적이고 대등한 존재이다. 누가 누구에게 군림하는 갑을 관계가 아니다. 이들이 서로 감정이입(感情移入)하고 존중하며 국정 파트너로 연계돼야만 다면적으로 진화한 민주주의에 부응하고 거버넌스를 충실하게 이룰 수 있다. 이제는 갑질 정치인들이 오만한 자아도취에서 깨어나 정치와 행정의 균형을 맞출 때이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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