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소의 승리│배대웅 지음│계단

 

1887년 獨 제국물리기술소부터

현재 나사까지 국가연구소 조명

 

美, 오펜하이머 원자폭탄 연구로

2차 세계대전 끝내고 패권 확보

21세기 들어선 全 국가적 협력

팬데믹 극복·우주 연구 연대도

1940년 미국 버클리방사선연구소에서 어니스트 로런스(왼쪽 첫 번째) 등 과학자들이 모여 사이클로트론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 국가의 지원에 힘입은 대규모 실험과 다학제 간 융합을 특징으로 하는 버클리방사선연구소는 현대적 연구소의 기본 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계단 제공
1940년 미국 버클리방사선연구소에서 어니스트 로런스(왼쪽 첫 번째) 등 과학자들이 모여 사이클로트론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 국가의 지원에 힘입은 대규모 실험과 다학제 간 융합을 특징으로 하는 버클리방사선연구소는 현대적 연구소의 기본 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계단 제공

세계적인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오펜하이머’는 관객들을 미국 뉴멕시코주의 황량한 사막으로 초대한다. 실존 인물인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연구소의 이름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1940년대 초 오지나 다름없던 곳에 세워진 연구소에는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미 정부의 주도하에 원자폭탄을 만드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던 것. 연구소에서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는 단 3년 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어냈고, 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전쟁 이후의 세계 패권은 미국의 손에 떨어졌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예는 과학이 국가에 의해 전략적 자원으로 활용되며, 연구소는 과학을 국력으로 전환하는 엔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때로 그것이 파괴적인 방향으로 발현될지라도 말이다. 최근 중국이 해외 연구인력을 대대적으로 포섭해 연구소 역량을 키우는 ‘천인계획(千人計劃)’을 적극 추진하는 것도 이러한 판단 때문이다. 이처럼 연구소는 단지 ‘과학자의 공간’이 아니며 국가적 요구와 정치적 판단, 산업의 이해가 얽혀 있는 복잡다단한 조직이다. 실제로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연구소가 뒤에 자리하고 있었고, 연구소가 만들어낸 결과물은 다시 사회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책은 근대적 국가연구소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는 1887년 독일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서부터 2022년 미 항공우주국에 이르기까지 연구소의 135년 역사를 다룬다. 먼저 과학자의 서재나 실험실에서 이뤄졌던 ‘개인적’인 과학 연구는 근대에 들어와 국가의 관심 사안이 되고, 연구소라는 공간에서 이뤄지는 행위로 변모한다. 국가가 취약성을 드러낼 때 그것을 보완할 ‘사회적 장치’로 연구소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연구소를 국가프로젝트 실행기관으로 가장 먼저 활용한 나라는 독일이었다. 1887년 설립된 제국물리기술연구소는 정밀 측정과 기술 표준의 수립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이어 독일 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선 기초연구에 특화된 국가연구소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결과 1911년 세워진 것이 바로 카이저빌헬름협회로, 인류 최초의 인공질소비료 대량 공급 등의 결과를 이끌어 냈지만 1차 세계대전 와중에 독가스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면서, 기관은 1948년 막스플랑크협회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협회는 단순히 과학 연구를 넘어 국가 균형 발전과 사회 통합이라는 가치에 기여하기도 했다. 1990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하면서다. 막스플랑크협회는 서독의 세계적 연구체제를 확산하기 위해 동독 지역에 18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 연구소의 구조조정과 직위 감축까지 단행한 결과, 드레스덴·라이프치히·포츠담 등 동독 도시는 통일 독일의 새로운 혁신 거점으로 변모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과학이 국가와 손을 잡은 순간 역사의 흐름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었을까. 1931년 미국 버클리 방사선연구소로 눈길을 돌려보자. 당시 어니스트 로런스라는 실험물리학자가 고에너지 입자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사이클로트론이라는 장치를 고안한 후, 점차 커지는 장비를 관리할 시설, 자금, 인력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대규모 실험과 다학제 융합이 최우선 목표로 놓이면서 연구소는 이를 위해 국가와 사회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지원받았다. 과학자와 정부의 거대한 협력 모델이 만들어진 것이다. 동시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제조라는 국가적 목표에 과학을 헌납하기도 했다.

과학으로 인한 서양의 눈부신 성장을 목도한 동양은 어떤 방식으로 연구소를 활용하게 됐을까. 일본 최초의 국가연구소인 이화학 연구소는 1917년 설립돼 과학 선진국들을 맹추격했고, 실생활 밀착형 신기술을 기업에 이전해 산업 성장에 기여했다. 연구소의 역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참패한 후에도 이어졌다. 연구소 과학자들이 패전 후 단 4년 만에 첫 노벨상을 받아 국가적 사기를 끌어올렸고, 2016년엔 동양 최초로 주기율표의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다.

한국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다소 늦게 과학기술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과학기술 기반 공업화’라는 목표는 분명했다. 1959년 설립된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원자력발전소 건설 등 산업화를 위한 인프라를 깔았고, 1966년 세워진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해외에 나가 있던 한국인 과학자들을 유치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산업기술을 연구했다.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에는 연구소가 기여한 것이다.

책은 말미에서 “21세기 연구소는 더 이상 국가 단위의 실험실에 머물러 있지 않다”며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인 2022년 미국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를 중심으로 국제 과학자, 기업, 정부가 협력한 사례를 든다. 미국 항공우주국 중심으로 각국 연구소가 연대해 우주 탐사와 소행성 충돌에 대비하려는 노력도 좋은 예다. 그렇지만 최근 중국의 공격적인 연구소 강화 등 과학의 영역에 국가의 그림자는 여전히 어른거리고 있다. 그리고 각국의 경쟁 속에서 연구소가 성장과 후퇴의 기로에 놓인 국가 중 하나가 한국이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책은 연구소의 힘을 재확인하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단순한 과학이 아니라 그 너머의 국가적 미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384쪽, 2만2000원.

인지현 기자
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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