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문학동네
소설은 작가 자신을 투영하기 마련이다. 성별과 나이, 직업과 인종을 달리하는 화자를 내세우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작가가 머물고 있으며, 다른 얼굴을 한 채 독자 앞에 선다. 그래서일까. 수십 년간 다양한 화자를 만들어온 거장들은 노년에 이르러 한층 더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는다. 그간 ‘속죄’ ‘암스테르담’ 등을 통해 사회와 개인의 관계, 도덕적 딜레마와 같은 주제를 다뤄온 이언 매큐언도 마침내 “가장 자전적인 소설”로 돌아왔다.
‘레슨’은 어느덧 80대가 가까워진 현대 영문학 거장의 삶과 많은 부분에서 겹쳐진다. 1948년생인 매큐언은 주인공 롤런드와 마찬가지로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리비아에서 살다가 영국으로 돌아왔고, 기숙학교를 다녔다. 어머니가 재혼해 이부남매가 생긴 점, 소설 후반부에 드러나는 극적인 가족사도 실제 그의 삶이다.
소설은 롤런드가 ‘피아노 레슨’을 받던 어린 시절로 시작한다. 엄격하고 차가운 피아노 선생 미리엄 코넬과의 수업은 숨 막힐 정도로 긴장되지만 동시에 묘한 분위기를 품는다. 둥근 얼굴과 꼿꼿한 자세, 향수 냄새. 열한 살의 롤런드에게 비친 미리엄은 이런 모습이다. 격정 로맨스에 익숙한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둘은 결국 금단의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이후 노년기까지 묘사되는 롤런드의 삶은 혼란과 상실의 연속이다. 아내 앨리사의 실종과 그를 쫓는 중 알게 된 숨겨진 가족사 등 그의 인생은 고난의 굴레에 가깝다. 강렬했던 피아노 레슨 정도로는 미처 깨달을 수 없는 인생의 교훈, 즉 ‘레슨’은 삶이라는 인고의 시간 끝에 찾아온다.
물론 회고록이 아니기에 롤런드는 매큐언과는 다른 선택을 내린다. 매큐언은 2022년 책이 현지에서 출간될 당시에 “롤런드는 어떤 면에서 내가 살았을 법한 삶을 살고 있지만,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는 다른 길로 갈 수 있었던 순간들이 있다”고 말했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남겨진 선택지는 소설이 되어 다시 펼쳐질 수도 있다. 미처 걸어보지 못한 길을 상상 속에서 힘껏 내디뎌보는 일, 그것이 우리가 소설을 읽고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696쪽, 2만2000원.
신재우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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