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해사 흰닭, 파드레, 그리고 오렌지 반란군의 기이한 모험
딜런 유 지음│뿌리와이파리
동아시아- 유럽의 교류시작 시기
제주 해안가에 표착한 하멜 일행
포로에서 선교사가 된 조선 청년
베트남에 다녀온 선비 조완벽 등
바다를 건넌 군상들의 모험 통해
세계사 편입된 조선 이야기 다뤄
“계사년 7월 24일, 서양국 만인 ᄒᆡᆫ듥얌ᄉᆡᆫ 등 64명이 한 배에 동승하여 대정현 연안에서 난파했다.”
조선 후기 이익태가 쓴 ‘지영록’의 한 부분이다. 이 책은 1694년 이익태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책이다. 계사년은 1653년, 이 해에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 표류해 왔으니, 서양국 만인은 하멜 일행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말 ‘ᄒᆡᆫ듥얌ᄉᆡᆫ’은 도대체 누굴 가리키는 걸까. 이 사람은 유득공이 전하는 하멜 이야기 속 ‘백계야음사이은(白鷄也音斯伊隱)’과 어떤 관계일까.
이 책은 조선과 서양의 첫 만남을 이런 흥미로운 질문으로 열어젖힌다. 16세기와 17세기는 동아시아와 유럽이 처음으로 직접 교류하기 시작했던 때다. 중세의 마지막이고, 근대의 초기로, 이른 근대 또는 근세라고 부르는 시기다. 이 시기에 조선은 일본·청나라와 네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존망 위기를 맞았고, 중국에선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됐으며, 일본에선 에도 막부시대가 열렸다. 또 유럽 상인과 가톨릭 선교사가 찾아와 문물과 사상을 교류하면서, 비로소 동아시아와 서양이 본격적 영향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격변과 전환의 시기였던 셈이다.
제목이 독특하다. ‘항해사 흰닭’에서 흰닭은 유득공의 백계(白鷄)를 우리말로 옮긴 표현이다. 백계는 ‘ᄒᆡᆫ듥’을 ‘흰닭’으로 읽은 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중세 언어학적 지식을 동원해 이를 반박하고, ‘ᄒᆡᆫ듥얌ᄉᆡᆫ’이 헨드릭 얀손, ‘하멜 표류기’에 나오는 일등항해사 헨드릭 얀서임을 밝혀낸다.
흰닭은 당시 동아시아를 찾아온 유럽인을 상징한다. 저자는 동서양 자료를 두루 훑으면서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의 동아시아 무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그 동력은 은이었다. 남미의 은이 필리핀 등을 거쳐 중국에서 교환되면 직접 유럽에 보내는 것보다 두세 배 차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사에서 이들은 남만인(포르투갈인·스페인인)과 홍모인(紅毛人·네덜란드인)으로 나타난다.
파드레(padre)는 스페인어로 가톨릭 신부를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흰닭’이 조종하는 배를 타고, 동아시아로 찾아와 목숨 걸고 신앙을 전파했다. 저자는 파드레와 관련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살던 조선인 토마스 이야기를 소개한다. 토마스는 임진왜란 때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가톨릭 신자가 됐다. 1618년 그는 신앙을 전파하려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아마 조선에 기독교가 전파된 첫 사례일 테다.
‘오렌지 반란군’은 근세 동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약한 네덜란드인을 말한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 네덜란드는 향료를 얻으려 해양 패권을 쥔 두 나라와 다른 경로로 동아시아에 진출하려 했다. 심지어 이들은 북극항로를 개척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이들이 나가사키를 드나들면서 일본에 끼친 영향은 잘 알려져 있다. 근세 동아시아 바다는 이들의 등장과 함께 격랑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흔히 사람들은 하멜 같은 ‘흰닭’이 찾아왔을 때 조선이 서양 기술을 적극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닫아거는 바람에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 청나라와 전쟁을 치른 직후였기에 조선의 무역 확대나 군비 확충에 제약이 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칫 파멸적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까닭이다.
게다가 조선의 바다는 막히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진주 선비 조완벽 이야기는 한 예다. 이 사람은 교토에서 상선을 타고 베트남, 필리핀, 오키나와를 돌면서 거금을 모아 돌아왔다. 1604년엔 남해안에 나타난 포르투갈 배를 교전 끝에 침몰시키고, 선원들을 체포해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1623년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가 조선에 표류했다. 그는 조선에 귀화해 박연이란 이름으로 훈련도감 소속 교관으로 활동했다.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은 것도 이 사람이다.
이후에도 조선 사람이 홋카이도나 타이완 등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기록도 전한다. 조선이 국제 무역에 복귀한 건 18세기 때다. 국력을 회복한 후, 일본에 인삼을 팔아 은을 받고, 이를 들고 중국에 가서 비단으로 바꾸는 삼각무역으로, 국제 네트워크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쇄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책은 ‘시민 인문학’의 한 뛰어난 사례다. 저자 딜런 유는 뉴욕의 글로벌 금융정보 통신사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는 지난 20년 가까이 주로 블로그를 통해 동서 교류사 등에 관한 다채로운 글을 발표해 왔다. 이 책은 그간 발표한 글을 종합한 것이다. 한 개인이 자기 관심사를 깊이 파고들어서 여러 책과 자료를 섭렵하고 학계 연구 성과를 꾸준히 학습한 후, 독특한 관점으로 서사화하면 좋은 저작을 남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568쪽, 2만4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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