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언어학자, 前 서울대 교수
수십 년 외국어교육 가르쳤지만
마주 보고 소통하는 시대는 옛말
요즘은 AI로 언어 장벽 무너져
외국어 중요성도 확연히 줄어
한자 익혀야 한글 안다는 인식
유연하게 바뀌면서 가치관 교정
어느덧 연말이 다가온다. 12월 중순이면 만으로 예순네 살이 되는 내게 올해 2025년은 조금 특별하다. 학창 시절부터 품어온 외국어 교육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이나 계기가 있던 건 아니다.
고교 1학년을 마친 뒤 여름방학에 일본에서 두 달여 동안 홈스테이를 했다. 간단한 일본어와 단어 몇 개를 배웠다. 말이 통하는 순간이 기쁘고 참 좋았다. 더듬더듬 일본어를 하는 나를 주변의 일본인들이 무척 반겨 줬다. 외국어에 큰 흥미를 느낀 것은 그때부터다.
미국 고등학교에서 외국어는 선택 과목이었다. 한때 미대 진학을 꿈꿨을 만큼 좋아했던 미술을 택했다. 외국어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을 다녀온 이후로 외국어에 관한 관심이 커졌다. 스페인어로 선택 과목을 바꿨다. 문법 중심의 고전적인 수업이었지만, 발음 연습을 즐겼고 뜻이 통하는 순간이 참 좋았다. 크게 고생하지 않고 우등생이 되었다.
대학에서 스페인어와 일본어 공부를 계속했다.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일본어 전공은 자연스러웠다. 한국 유학생들에게서 한국어를 처음 배우고, 1983년 한국에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했다. 말이 통하는 즐거운 순간을 매일 만끽하면서 한국어와 사랑에 빠졌다. 외국어에 관한 관심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외국어 습득에 관한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약 25년 동안 대학에서 외국어와 외국어 교육에 대해 가르쳤다. 코로나19 직전에는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새롭게 낯선 언어와 단어를 익히며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했다.
거의 50년 동안 외국어에 깊이 빠져 지냈다. 외국어 교육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내가 시대의 변화에 영향을 받았다. 핵심은 인공지능(AI)이다. 2010년대 이후 확산한 스마트폰과 사회관계망(SNS)으로 인해 세계는 좁아졌다. 얼굴을 마주하고 말로써 소통하는 시대는 어느덧 옛말이다. 이제는 문자·이모티콘·음악·사진·기계 등을 통해 소통이 이루어진다. 사진이 전부가 아니다. 이제는 음악도 같이 올린다. AI를 통해 텍스트만이 아니라 음성도 거의 정확하게 통·번역이 가능하다. 언어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외국어의 의미는 매우 작아졌다. 개인적으로 이미 배운 외국어를 즐겁게 사용하곤 하지만, 복잡한 이 시대에 외국어의 중요성은 확연히 줄어들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 문자 전파의 과정을 담은 역사책을 쓰고 있다. 이 시대에 문자 전파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한자가 자꾸 눈에 걸린다. 일본어 전공 시절 한자를 많이 배웠다. 지금도 어려움 없이 일본어로 된 현대소설과 전문서적·신문·잡지 등을 즐겨 읽는다.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한자는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한자와 자주 접했다. 대학 시절에 익혀둔 한자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때는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외국인이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고도 여겼다.
그런데 한자의 필요성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부하고 싶다면 배워도 좋겠지만, 교육과정에 반드시 한자를 포함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나부터 동의하기가 어렵다. 설득력이 확실히 약해졌다. 문자의 역사를 돌아보며 발견한 것은 뜻밖에도 한글의 우수성이다. 한자에 대한 인식 전환은 시대 변화를 반영한다. 한자는 이제 더는 소통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한자에 담긴 문화적 지식과 지혜는 한글만 배워도 충분하다. 한자를 익히기 위해 고생하기보다 그 시간을 다른 데 쓰는 게 훨씬 나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중국과 일본 초등학생들의 한자 배우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이제 고생하는 그들이 어쩐지 안쓰럽다. 한국에는 이렇게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이 있는데, 저들은 어쩌나 싶다. 어느덧 나는 한글 전용주의자가 되었다.
60대에 새로운 현실을 인정하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함은 나름 자부할 만하다. 예전의 생각을 고수하고 고집하는 건 앞으로의 삶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지나간 시대만이 옳다고 그 시대의 틀을 고집하는 건 현명하지도 않을뿐더러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임을 점점 더 깨닫는다. 오랜 시간 품어온 가치관을 고집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게 된 듯도 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생각의 변화가 반갑지만은 않다. 아쉬움과 불안이 없지는 않다. 시대에 맞춰 생각을 바꿨지만, 과연 시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다.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매일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겨 앞날의 예측이 정말 어렵다. 2010년대 후반부터 정치적 쇼크, 팬데믹, 전쟁, AI 등 위기의 징후가 동시다발적으로 에워싼 느낌이다.
그러나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시대 변화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밖에 없다. 변화가 심하고 언제나 큰일이 터질 수 있는 이 시대를 따라가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올해 나는 오랜 시간 유지해온 외국어 교육에 관한 가치관을 교정했다.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한다. 누군가가 심정을 묻는다면, 후회나 아쉬움보다는 이 나이에도 이럴 수 있어 안도하는 마음이 훨씬 크다고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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