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훈 논설위원
李정부, 개헌 의제·시점 내놓고
공론화·절차 후속 조치 무소식
여당도 개혁 아닌 내란 저격만
헌법과 충돌 불사한 李무죄化
대의명분이 없음을 반증할 뿐
개헌 방치·오용 땐 헌정史 유죄
헌정회가 지난 12일 주최한 ‘분권형 권력구조 헌법 개정 대토론회’로 가는 길이 매끈하지 않았다. 오랜만이라 해도 몇 번을 두리번거려야 국회도서관 뒤편의 국회의정관 105호실을 찾을 수 있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개헌론에 앞장서온 ‘전직’ 국회의원 단체 행사다. 헌법학회·정치학회 등 21개 유수 학술·시민 단체가 이름을 올렸다. 적지 않은 기대로 들어선 토론회장은 협소했다. 머리와 걸음마다 세월이 내려앉은 전직들이 자리를 메웠다. ‘현직’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여야 원내대표들도 서면 인사말만 보냈을 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국회 본청 앞에선 국민의힘 의원들이 ‘대장동 검찰 항소 포기 외압 규탄대회’를 열고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는 의원회관에서 열린 당 행사에 간 모양이었다. 정대철 헌정회 회장은 1987년 이후 8명의 대통령 이름을 부르며 “모두가 공약했지만 실천하지 않은 정치개혁 과제가 바로 개헌”이라고 일갈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공약했지만 흐물흐물한다”고 했다. 저마다 제왕적 대통령과 입법 폭주를 막아야 한다고, 적대적 정치 양극화 해소에 개헌이 필수라고 얼마나 목청을 높였던가. 국가적 위기가 개헌의 최적기라고들 하지 않았나. 토론회는, 이제는 힘없는 사람들끼리만 해대는 한탄 같아진 개헌론의 현주소였다.
지난 8월 밝힌 이재명 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안’의 123개 국정 과제 가운데 첫머리가 개헌이었다. ‘국민이 하나 되는 정치’를 목표로 “독단적 정치, 분열·갈등을 조장하는 권력에서 벗어나 통합을 위한 정치 실현”의 과제라고 했다. 다 믿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당면한 근본 문제를 회피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대통령 4년 연임제와 결선투표제, 총리의 국회 추천제 등의 의제가 거론됐고 2026년 지방선거, 또는 2028년 총선이라는 개헌 시점도 제시됐다. 예서 찬반을 논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것뿐이었다. 절차적 기반(국민투표법 개정)을 마련하고 사회적 합의 도출(공론화)하겠다고 했는데, 더는 알려준 게 없다.
당·정·대가 ‘한 몸’(정청래 대표)이라는 여당 역시 개헌을 찬밥 취급했다. 관심은 딴 데 있었다. 당력을 집중해온 내란 종식(청산)은 국정 과제엔 없는 의제다. 비상계엄 사태의 진상을 밝히는 게 헌정 위기의 재발을 막는 데 선결과제라고 치자. 전임 정부의 오류를 바로잡는 일도 필요한 조치라고 하자. 그래서 3개 특검을 동시에 출범시켰으면, 본연의 개혁 과제로 중심을 옮기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국가 시스템 개혁보다 특정 자리와 조직, 사람을 겨눈 ‘저격’ 입법에 골몰했다. 방송통신위원회 폐지와 검찰청을 없앤 정부조직법 개정이 그러했다. 판·검사를 처벌하고 쫓아낼 수 있는 법왜곡죄 신설, 검사징계법 개정(검사 파면법) 등은 국정 과제에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대부분 헌법과 충돌 지점에 있었다. 대법관 증원과 자격·추천 변경 문제도, 내란사건 전담재판부 논란도 마찬가지였다. 삼권분립이 형해화하는 일들 또한 그러했다. 정교해 보이지도 않는, 마구잡이 ‘이재명 무죄 만들기’ 프로젝트를 연상시킨다. 충분한 대의명분이 있었다면 개헌이 아닌 일반법으로, 설득이 아닌 숫자로 밀어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떳떳하지 못하니 보복이 되고, 변명이 구차한 것일 테다. 대장동 재판 항소 포기 논란의 진앙도 거기다.
헌정회 토론회에서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한국의 정치병은 헌법에서 비롯됐고,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 헌법 수호”라고 했다. “시장의 실패보다, 정치의 실패보다 중요한 것은 헌법의 실패”라는 노벨상 수상자 제임스 뷰캐넌의 말도 인용했다. 정치 문제를 이보다 함축적으로 표현한 경고는 없을 듯하다. 강원택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연구원장이 지적했듯 “일방주의적 국회 운영이 일상인 상황에서 개헌을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는 현실론을 인정한다. ‘권력을 가진 자에겐 현상 유지가 가장 유리한 제도’라는 경험칙도 안다.
모든 셈법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과의 약속이다. 개헌 간판을 걸어놓고 시늉만 할 참이라면, 다른 저의라도 끼어든다면, 그게 야바위 정치가 아니고 뭐겠나. 누구의 무죄는 모르겠으나, 개헌 방치·오용이 헌정사에 씻을 수 없는 유죄가 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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