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접 가봤습니다 - (4) 국립중앙도서관 지하서고
중앙도서관 전체장서 1500만점
온도 20도·습도 50% 환경관리
93년 된 사전·하이틴 로맨스…
낡은 책 복원하고 디지털작업도
“도서관에 지하 5층까지 있다는 거 알고 계셨어요?”
몰랐다. 우리가 드나드는 국립중앙도서관의 깊은 곳, 그 아래 또 다른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을. 지성의 보고이자 기록의 창고, 일상 속에선 문화공간이기도 한 도서관의 아래쪽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는, 책을 읽는 대신 책을 ‘살리는’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지난달 말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자료보존서고를 찾았다.
엘리베이터를 한 번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와 또 한 번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비로소 서고에 도착할 수 있다. 문이 열리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 우선 다가온 것은 묵직한 종이 냄새. “여기부터가 진짜 서고입니다.” 사서의 안내를 따라 경계의 공간을 통과했다. 선반 사이를 걷다 보니 바스락거리는 소설책 하나가 시야를 붙잡는다. 1980년대 하이틴 로맨스 소설이다. ‘미혹의 계절’부터 ‘베일 속의 연인’ ‘유혹의 로케이션’까지, 제목부터 강렬하다. 책을 들어 살짝 펼쳐보니 종이가 거칠게 일어났다. 녹색 표지에 단순한 표지 디자인, 지금은 검색조차 되지 않지만 그 시절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100권이 넘게 출간된 시리즈라고 한다. 건너편 서고에는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도서, 그리고 1933년에 만들어진 국어사전이 놓여 있었다. “책도 나이 들어요. 종이는 습기랑 빛, 사람 손만으로도 천천히 죽어갑니다.” 사서는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책을 제자리에 꽂는다.
과거 희귀 자료가 보관된 서고에서 나와 신간들이 모여 있는 서고로 이동하자 냄새부터 다르다. 퀴퀴했던 이전 서고보다 날카롭고 건조한 냄새. 똑같이 종이인데, 40년의 차이를 코가 먼저 느낀다. “신간은 매일 배가 작업을 해줘야 해요. 하루에만 700권 넘게 들어오거든요.” 국립중앙도서관 전체 장서는 1500만 점이 넘는다. 본관에는 지하 1층부터 층층마다 서고가 있으며, 별관에 위치한 자료보존서고만 해도 지하 5층까지 이어진다. 면적으로는 축구장 두 개 이상, 높이는 6m가 넘는다. 걸어 다니기에 무리가 있어 이동용 전동 카트도 있다. “여긴 올해 입고된 책들입니다.” 사서가 가리킨 서가엔 책이 여유롭게 꽂혀 있다. 청구기호를 기준으로 배치하되, 책등 간격은 넉넉하다. 이 작업을 ‘가배가’라 부른다. 그런데 1년 뒤 이 서가는 빽빽하게 재정렬된다. 그것이 ‘압축배가’. 한 치의 공간이라도 아끼기 위한 밀착 정리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 작업은, 단지 공간을 비우기 위한 정리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오래, 더 많이 남기기 위해서죠.”
서고의 핵심은 환경관리다. 이곳의 온도는 20도, 습도는 50%로 유지된다. 너무 습하면 곰팡이가 생기고, 너무 건조하면 종이가 부서진다. 공조 시스템은 24시간 가동된다. 그럼에도 책은 결국 낡는다. 그때는 ‘복원’이 개입한다. 제본된 책을 해체하고, 세척과 탈산 처리를 거쳐 한지로 메우고 다시 평면화한다. 손상이 심하면 리프캐스팅이라 불리는 기계식 보강법을 쓴다. 복원이 끝난 책은 재제본 후 중성지 상자에 담겨 서가로 돌아간다. 사서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 책은 그렇게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한편에서는 책의 몸을 지키는 대신, 영혼을 복제하려는 시도도 이어진다. 바로 디지털화 작업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은 1995년부터 소장자료의 전자화를 추진해왔다. 훼손되거나 희귀한 자료를 우선적으로 스캔하고, 전국 공공도서관과 농어촌·산간 지역에서도 열람할 수 있도록 한다. 도서관에서 보유한 디지털화 장비 한 대의 가격은 수억 원대.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고해상도로 이미지를 저장하는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고요한 도서관의 지하에선 낡는 것, 사라지는 것, 새로운 것들이 한데 뒤엉키고 있다. 그 와중에도 결국 책은 닳고 사라진다. 종이도, 문장도, 그 안에 담긴 사상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길, 방금 만졌던 책들의 제목을 되새긴다. 아마 그중 일부는 서점에서 곧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책은 이곳 지하 5층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오래 잠들어 있을 것이다. 시간을 견디며 더 단단하게.
신재우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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