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종훈의 백년前 이번週

1925년 11월 26일 조선일보에 단란해 보이는 한 가족의 사진이 실렸다. 기사의 주인공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화가이며 한국 여성 최초로 세계 일주 여행을 했던 나혜석으로, 남편인 중국 안동현 부영사인 김우영,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

“조선의 일류 화가 나혜석 여사라면 아마 누구나 그 이름이 귀에 익숙할 것이다. 조선 미술 전람회가 열릴 때마다 번번이 그의 그림이 입선되었고 반드시 2등 혹은 3등의 상품을 받게 되었으니 독자 여러분의 기억이 응당 사라지지 않았을 줄 믿는다. 나이 어려 고국을 떠나 강호(江湖)에 쓸쓸한 객(客)이 되어 돋는 해, 지는 달을 오직 서양화 연구에 몸을 바쳐 공부한 그 정성이 헛되지 아니하여, 일본미술학교 서양화 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조선에 돌아온 후 7개 성상(星霜·년)을 조금도 게을리 아니하며 짚세기 감발(버선 대신으로 발에 감은 좁고 긴 무명)로 화구(畵具)를 둘러메고 혹은 평양 혹은 개성 혹은 금강산으로 명승과 고적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에 열심을 다해 오는 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꿀 같은 가정을 이루고 어여쁜 아들딸이 슬하에서 갖은 재롱을 다 부리는 오늘날도 역시 끊임없이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으니, 대체 그의 가정생활은 얼마나 취미가 진진하고 얼마나 예술화하였을까? 여사를 아는 사람마다 한 번 그의 살림살이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가슴에 사무쳤을 터이다. 기자도 벌써부터 그의 가정을 방문하고자 항상 간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차, 마침 지난 20일에 우연히 안동현 땅을 밟게 되니 가장 먼저 발길을 움직여 찾은 곳이 나혜석 여사의 가정이었다.”

당시 나혜석의 집과 가정생활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기자의 방문기를 따라 나혜석의 집으로 들어가 보자.

“안동공원을 옆에 끼고 즐비하게 늘어선 영사 사택 중의 하나인 2층 양옥 벨을 누르니 기자가 보고 싶어하고 만나고 싶어하던 감옥살이의 옛벗이요 그 집의 주인공인 여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중략) 집안에 놓인 모든 기구가 하나도 정돈되지 아니함이 없고 주부가 예술가인 그만큼 모든 것이 예술적이요 문화적이었다. 금년에 5살 된 미소녀 나열이와 2살 된 아들 선이가 저녁때 유치원으로부터 돌아오면 적막하던 가정에는 사랑의 꽃이 되고 화평한 웃음이 가득해지는 것이다. (중략) 여사는 일과로 정해 놓은 순서 이외에 앞의 일을 미리 당겨서 해 두고 며칠 동안은 그림을 그리러 다닌다 한다. 여사는 기자를 보고 ‘내년에 6월쯤 대련에서 한 번, 북경에서 한 번 전람회를 열어 보고 성적이 좋으면 좀 더 그림을 연구하러 불란서로 떠날까 합니다. 아무리 해도 예술의 왕국을 찾아 가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예술을 얻기가 어려운 줄 압니다. 그리고 아이들 교육은 그저 원시적으로 해 보려 합니다. 이따금 조금씩 감독하는 점도 있지마는 대개는 내버려 둡니다. 한 살 반만 되면 젖을 떼고 따로 재웁니다. 음식도 이것은 맵다, 이것은 짜다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저희들이 먹어 보고 맵든지 짜든지 하면 먹으라고 해도 먹지 않으니까요’ 하고 말하더라. 아! 화평한 가정! 행복된 가정! 예술의 궁전이 길이길이 빛날지어다.”

19세기발전소 대표

※ 위 글은 당시 지면 내용을 오늘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옮기되, 일부 한자어와 문장의 옛 투를 살려서 100년 전 한국 교양인들과의 소통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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