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120년 전 한반도는 폭풍우 속에서 표류하는 난파선 같았다. 일본 제국은 1905년 6월 러일전쟁 승리 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 8월 영일 동맹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했다. 고종이 버티자 일본 측은 8명의 대신 중 5인(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의 찬성으로 조약을 강행했다. 을사년이던 1905년 11월 17일 벌어진 일이다. 고종은 조약이 무효라고 했고,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 운동도 거셌지만 5년 후 대한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을사년인 올해도 격변이 이어진다. 4년 만에 백악관에 복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충격과 공포’ 정책으로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해방의 날”을 선언하며 관세전쟁 포문을 연 것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와 상호 관세·자동차 관세 인하 협상을 벌인 끝에 지난 14일 한미 공동 설명자료와 ‘한미 전략적 투자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발표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이날 브리핑 때 미측 MOU 초안에 대해 “기절초풍할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안”이라면서 올해가 을사년임을 떠올렸다고 했다. 19일 한 유튜브에 출연해선 “을사늑약은 저리 가라 할 수준”이라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브리핑 때 “비자발적 협상에서 최대 무기는 버티는 것”이라고 했다. 버티기 덕분에 ‘신판 을사늑약’은 피했다는 말로 들리지만, 약속한 대미투자액 3500억 달러가 을사년의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이 대통령은 “국제사회는 법적인 강제 규범이 없는 곳”이라고도 했다. 제국주의 시대였던 120년 전이나 요즘이나 세상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로, 결국 국력 강화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뜻이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는 28일 ‘을사조약 120주년 한일국제학술대회’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개최한다. 대회 주제는 ‘불법성’의 이면-을사조약의 역사적 재검토인데, 불법성에 따옴표가 붙여진 것은 이에 대한 한일 견해차를 시사한다. 그래도 양국 학자들이 을사조약을 함께 논의하는 것은 불행한 과거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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