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범 산업부장

 

4대그룹 국내만 1400조 투자

역대 최대규모, 의욕치 평가도

첨단산업 천조弗 투자戰 양상

 

승자독식으로 게임의 룰 변화

주요 국가들 기업 무차별 지원

마지막 기회, 실패시 경제참사

삼성전자와 SK, 현대차·기아, LG 등 4대 그룹 총수는 지난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 협상 후속 민관합동회의에 참석한 뒤 향후 5년간 국내에 803조 원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SK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쏟아부을 600조 원까지 더하면 총 투자 규모는 1400조 원에 달한다. 우리나라 국가 예산의 2배 이상이다. 이행만 된다면 단연 사상 최대 규모다.

재계의 천문학적인 투자 계획에 경제계조차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분위기다. 의욕치에 가깝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한 관계자는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들러리로 세우곤 한 기업들의 투자 계획이 제대로 이행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표된 금액은 문재인 정부 시절(약 300조 원)의 수배에 달한다. 삼성전자와 SK㈜·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기아, LG㈜·LG전자·LG에너지솔루션 등 주력 계열사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을 다 합쳐도 현재 110조 원 정도다. 기업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투자 계획이다.

재계의 엄청난 투자 계획은 정부에 잘 보이고 국가 발전에 일조하겠다는 취지만은 아닐 것이다. 그 배경엔 미래 첨단산업의 주도권 경쟁이 국가 간 패권 경쟁으로 바뀌면서 게임의 룰 자체가 바뀌는 시대 변화에 대한 절박한 인식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기술·인재 부문보다는 대규모 자본력과 투자 여력 여부가 승패를 가르는 압도적 경쟁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승자 독식 구조’로 끝나기 마련인 첨단산업 특성상 대규모 투자 과정에서 한 발만 잘못 내딛거나, 실기해도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나락에 빠져들게 된다. 관세 부담과 중국의 덤핑 공세, 내수침체 장기화, 고환율 등 어려운 여건들은 셀 수가 없지만 결국은 가야 할 길이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SK그룹 회장)이 최근 정·관계와 가진 경제 현안 정책간담회에서 밝힌 발언에서 이 같은 위기의식을 잘 읽을 수 있다. 최 회장은 “국제 무대에서 게임의 룰과 상식이 다 바뀌어 버렸다”면서 “완벽하게 자국 중심의 정책이 대세가 되고 각 나라는 자기 나라의 기업을 밀어주기 위한 기왕에 없었던 정책들을 활용하고 있다”고 정세 변화를 진단했다. 이어 “주요 빅테크의 큰 기업들은 AI에 수천억 달러에서 조 달러 단위의 투자를 발표하며 차원이 다른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어떤 성장 전략을 무기로 이 정글 같은 시장을 돌파할지 고민”이라는 심정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다.

주요 국가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원책과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은 오픈AI 주도의 초거대 AI 인프라 투자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향후 4년간 450조 원을 투입하는데, 백악관이 뒷배 역할을 한다. 구글·메타 등도 천문학적인 투자를 벼르고 있다. 프랑스는 정부 차원에서만 1000억 유로(약 183조 원)가 넘는 자금을 AI 산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도 토요타·소니·NTT·소프트뱅크·미쓰비시UFJ·키옥시아 등과 공동출자해 세운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에 약 27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직접 지원한다. 과거만 해도 엄청난 덤핑 관세를 각오해야 하는 지원이다. 1인당 소득에서 이미 한국을 넘어선 대만은 2017년부터 반도체 등 첨단산업 기업에 한해 ‘주 40시간 근무’를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법률을 시행하고 있다. 2023년에는 ‘대만판 반도체법’을 제정, 투자와 고용을 총력 지원하고 있다.

낡은 규제와 반기업 정서를 붙들고 있는 정·관계는 발상을 싹 바꿔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천문학적인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산업계의 노력도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낡은 금산분리(금융과 산업 자본의 분리) 규제로 인해 우리 기업은 엄청난 기회손실을 감수하고 있다. 초거대 데이터센터나 첨단 공정을 도입할 때 금융투자그룹이나 펀드가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고 기업과 이익을 나누는 방식은 국내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해외에서는 흔한 사례다.

기업들은 5년 뒤 10대 수출 주력 업종의 경쟁력이 죄다 중국에 뒤처질 것(한국경제인협회 1000대 기업인 설문조사)으로 보고 있다. 재계의 이번 투자 프로젝트가 틀어지면 되돌이킬 수 없는 경제 참사로 귀결될 것이 뻔하다. 정부가 응답해야 할 차례다.

이관범 산업부장
이관범 산업부장
이관범 기자
이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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