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최근 “서구에서 100년 된 규제를 몇 개 회사의 민원 때문에 바꿀 수는 없다”며 금산분리 완화에 선을 그었다. 그는 “(재계의) 민원성 논의가 주를 이루는 것 같아 불만”이라는 직설적인 표현까지 동원했다. 지난 43년간 금산분리가 금융 안정에 나름대로 순기능을 해온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은행법 개정으로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를 4%로 제한해 고객 자산 보호와 경제력 집중 억제에 일정한 역할을 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인공지능(AI)과 ‘빅 블러(Big Blur)’의 거대한 구조 변화 속에 있다. 디지털 경제로 산업·업종 간 경계가 급속히 허물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전국은행연합회가 금산분리 완화를 요구할 정도로 현실이 변했다. 한국에서는 미국의 애플페이, 중국의 알리페이 같은 서비스가 불가능하다. 국내 은행들이 “ICT(정보통신기술) 금융 플랫폼에 맞설 수 있도록 핀 테크와 빅 데이터 산업 진출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배경이다.

미국 빅 테크들은 ‘자본 혁명’을 시도 중이다. 대규모 AI 설비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새로운 금융구조를 만들고 있다. 기존의 은행 차입·회사채 발행뿐 아니라 사모펀드·부동산업체들과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워 수백억 달러 규모의 하이브리드 투자에 나선다. 일본 보험회사들도 금산분리 완화로 헬스케어와 노인요양산업에 진출해 신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다. 반면 SK하이닉스와 LG에너지솔루션 등은 미국에 지주사의 손자회사 형태로 공장을 짓고 싶어도 발목이 잡혀 있다. 공정거래법에 증손회사는 100% 자기자본으로 설립해야 한다는 규제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자사주를 소각하려 해도 삼성생명·삼성화재 지분이 10%를 넘지 않게 금융위원회 눈치를 봐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샘 올트먼 오픈AI CEO를 만나 AI 분야의 금산분리 완화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여당도 AI 등 전략산업에 투자할 때 지주회사의 손자회사가 SPC를 세울 수 있게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반세기 가까운 금산분리의 족쇄를 풀어야 할 때다. 공정위만 나홀로 ‘갈라파고스 규제’를 고집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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