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수교 60년… 새로운 미래 위한 다섯번의 대화

(1) 정치철학자의 만남 - ‘힘없는’ 가부장이 필요하다

최근 일본 개풍관에서 만난 우치다 다쓰루(오른쪽) 고베여대 명예교수와 배세진 연세대 매체와예술연구소 연구원.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두 사람이 타자에의 환대를 강조하는 레비나스 철학을 바탕으로 한일관계의 미래에 대해 논했다. 이들은 “양국 모두 내부적인 커먼즈(공유자원)를 회복하고, 작고 느슨한 공동체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동미 기자
최근 일본 개풍관에서 만난 우치다 다쓰루(오른쪽) 고베여대 명예교수와 배세진 연세대 매체와예술연구소 연구원.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두 사람이 타자에의 환대를 강조하는 레비나스 철학을 바탕으로 한일관계의 미래에 대해 논했다. 이들은 “양국 모두 내부적인 커먼즈(공유자원)를 회복하고, 작고 느슨한 공동체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동미 기자

고베 = 글·사진 박동미 기자

“영화 ‘국제시장’ 황정민(덕수 역)의 대사에 공감하며 울 수 있는 건 한국과 일본 사람뿐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 나 약속 지켰어요, 나 힘들었어요’라고 할 때 쏟아지는 회한의 눈물. 거기에 한·일의 공통된 정서가 있고, 양국이 서로 환대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믿습니다.”(우치다 다쓰루·이하 ‘우치다’)

“한국과 일본은 세계화 속에서 동일한 맥락의 동일한 문제와 마주하고 있어요. 이럴 때 양국 정치철학자들이 강하게 접속해 함께 고민하고 사유하면 어떨까요. ‘한·일 철학’이나 ‘한·일 사상’도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배세진·이하 ‘배’)

70대 일본 교수와 30대 한국 연구자의 시선…‘우리는 서로 환대할 수 있는가’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75) 고베여대 명예교수는 ‘한국과 일본이 진정으로 협력을 이뤄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뜬금없이 10여 년 전 영화를 언급했다. 미래를 논하는데, 흥남철수, 파독광부, 이산가족 등을 다룬 영화라니. 너무나 ‘과거’다. 그러나 우치다 교수는 “‘그때가 좋았다’는 회귀적 발상이 아니다”라며 “양국관계의 개선을 위해 내가 제시하고픈 시민과 리더의 모습이 ‘약하고 친절한 가부장’인데, ‘덕수’가 그런 인간형에 가까워 보였다”고 설명했다.

반면, 배세진(37) 연세대 매체와예술연구소 연구원은 보다 도발적인 형태의 교유(交遊)를 제안했다. 배 연구원은 “동아시아 철학이라는 틀 내에서 한국철학과 일본철학을 접속시켜 볼 수 있다”고 했다. 또, 양국 모두 서양철학을 깊게 연구하고 교육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서양철학을 재료로 새로운 형태의 ‘한일사상’을 고안하는 것도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배세진 연세대 매체와 예술 연구소 연구원은 “한일 정치철학자들이 모여 고민을 공유하고 사유하면, ‘한일철학’ 이나 ‘한일사상’도 상상가능하다”고 제안했다. 박동미 기자
배세진 연세대 매체와 예술 연구소 연구원은 “한일 정치철학자들이 모여 고민을 공유하고 사유하면, ‘한일철학’ 이나 ‘한일사상’도 상상가능하다”고 제안했다. 박동미 기자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출생한 일본 노교수와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태어난 한국의 젊은 연구자가 최근 일본 고베에서 만나 한·일 관계를 둘러싼 숙제와 염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과의 우연을 제외하면, 닮은 게 하나 없어 보이는 40여 년 터울의 두 사람. 사실은 프랑스 현대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의 신봉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은 타자를 절대적으로 환대해야 할 초월적 대상으로 여기는 것. 이 대담에 더 확실한 명분이 있을까. 국경과 나이를 뛰어넘은 열띤 대화가 이어졌다. ‘타자’인 한국과 일본은 과연 서로 환대할 수 있는가, 두 타자 사이에 가장 필요한 태도는 무엇인가, 양국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고, 두 나라는 극단과 혐오를 넘어 유무형의 ‘커먼즈(공유자원)’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공동의 ‘한일철학’을 상상해봅시다” “‘약하고 친절한 리더’가 절실합니다”

“한·일 양국 철학자의 협동 작업! 매우 생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교수가 먼저 ‘공동 연구’ 제안에 긍정적 신호를 보냈다. 그는 “철학은 보다 높고 보다 넓은 시점에서 눈앞의 사건을 부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다”라면서 “참가를 요구받는다면 최대한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워낙 ‘잡(雜)한 인간’이라 평가받는 제가 과연 초대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웃음)”

배 연구원은 우치다 교수의 ‘약하고 친절한 가부장’론을 어떻게 봤을까. ‘약하다’와 ‘가부장’이라는 상충하는 두 어휘를 접붙인 ‘역설적 시도’다. “가‘부’가 아니라 가‘모’라 해도 되죠. 생물학적 또는 젠더적 남성·여성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지금 각 국민국가가 어떤 ‘리더’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포퓰리즘과 극우화 속에서 대중은 강한 리더를 선망하지만, 오늘날 국제정세를 보면 강한 리더가 운전하는 배는 침몰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라고 지적하고, “지금은 맨 뒷줄에 있는 사람을 더 생각하고 챙겨주는 ‘약하고 친절한 리더’, 즉 ‘힘없는 가부장’이 필요하다. 국가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모든 조직에서도 그렇다”고 강조했다.

일본 고베 개풍관에서 진행된 대담 중 생각에 잠겨있는 우치다 다쓰루 고베여대 명예교수. 우치다 교수가 운영하는 개풍관은 합기도 수련과 철학 공부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연대하는 지역 공동체다. 박동미 기자
일본 고베 개풍관에서 진행된 대담 중 생각에 잠겨있는 우치다 다쓰루 고베여대 명예교수. 우치다 교수가 운영하는 개풍관은 합기도 수련과 철학 공부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연대하는 지역 공동체다. 박동미 기자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순수한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은 “세계의 ‘강한’ 리더들이 만드는 작금의 ‘지옥도’를 한번 보라”고 꼬집었다. 트럼피즘의 대두와 함께 세계화의 흐름은 예측할 수 없으며, 미국과 중국 사이, 한국과 일본은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없다. 결국, 균형추의 역할을 해야 할 수밖에. 배 연구원은 “서로 협력해 세계의 균형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다”고, 우치다 교수는 “미국의 대일, 대한 정책이 완전히 바뀌는 위기 속에서, 한·일 협력의 당위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일본만의 ‘대안 세계화’ …“작고 느슨한 공동체가 답이다”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라는 맥락 속에서 ‘작은 세계화’ 또는 ‘또 다른 세계화’, 즉 ‘대안 세계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 시작점이 양국 간 문화·사상적 교류와 협력이라 생각해요. 이를 통해 국제정치적 혼란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배 연구원의 이 같은 주장에 상응해, 우치다 교수도 작고 느슨한 ‘코뮌(공동체)’의 재생을 강조했다. 단, 그것은 ‘공생의 감각’을 바탕으로, ‘약하고 친절한 가부장’이 이끌어야 한다. 그가 운영하는 ‘개풍관’은 주민들이 무도 수련과 철학 공부를 이어가는 작은 공동체다. 그곳의 ‘약하고 친절한 가부장’이 바로 우치다 교수인 셈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커먼즈’로 흘렀다. 양국 내부의 ‘커먼즈의 부재’가 타자에 대한 혐오를 양산하고, 과도한 능력주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바뀌어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여지조차 없애고 있다는 것이다. 우치다 교수는 “요즘 세대는 배움마저 흥정하고 거래한다”면서 “청년들이 교육에도 ‘소비자 정체성’을 가지게 됐는데, 그런 방식으론 어떤 지식도 진리도 얻을 수 없다. 즉,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배 연구원은 “교육자로서 이 점에 공감한다”면서 “학교에서부터 타자를 참고 견디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조금 더 느린 속도의 사회와 커먼즈를 만들어, 사람들이 정신적인 여유를 가지게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가능한 얘기라고요? 제도적으로 조금만 노력하면 가능한 것들입니다.”

일본 고베 개풍관에서 대담을 진행 중인 우치다 다쓰루(왼쪽) 고베여대 명예교수와 배세진 연세대 매체와 예술 연구소 연구원. 40살 터울의 두 사람은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교육자, 또한 다양한 분야에 사회적 목소리를 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동미 기자
일본 고베 개풍관에서 대담을 진행 중인 우치다 다쓰루(왼쪽) 고베여대 명예교수와 배세진 연세대 매체와 예술 연구소 연구원. 40살 터울의 두 사람은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교육자, 또한 다양한 분야에 사회적 목소리를 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동미 기자

극단과 혐오를 넘어설 ‘커먼즈’…“한·일, 그릇을 크게 만들 기회”

커먼즈의 부재로 세계의 현실 정치는 ‘포퓰리즘’과 ‘극우화’라는 양상을 띤다. 양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는 공동체의 안녕에 관심이 없고, 시민들은 아예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반대로 극단적인 주장이나 사상에 열광한다. 배 연구원은 “지식인이 시민 간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것이 암울한 정치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면서 “SNS가 아니라 지식인을 매개로 시민이 함께하는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우치다 교수는 철학자 레이몽 아론의 말을 빌려 “지식인이란 대중이 열광하며 거리를 걸어갈 때, 발코니에서 도로를 내려다보는 사람이다”라면서 “감정보다 논리를 더 무겁게 여기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데에 그 역할이 있다”고 덧붙였다.

두 나라를 관통할 ‘커먼즈’를, 그리고 양국의 건강한 협력을 강력하게 열망하면서도, 두 정치철학자는 종국엔 인류 문명의 미래를 낙관하진 못했다. 전쟁은 계속 전염되고, 그것이 기후위기와 결합하며, 서서히 붕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연착륙’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치다 선생님의 책 제목처럼 ‘위험하지 않은 몰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지식인은 연구와 분석 결과, 대안을 시민들과 공유하며, 포퓰리즘, 타자 혐오, 파시즘화의 결합 고리를 끊어내야만 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지식인이 지니는 책무입니다.” 우치다 교수는 그 ‘연착륙’ 과정에 파트너가 될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공감과 동질성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역시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산에 넣어도, 그 노력은 양국의 정치적 성숙을 위해 매우 좋은 경험입니다. 때론 완벽하게 ‘옳은 것’보다는, ‘큰 것’을 추구해야합니다. 지금은 우리의 그릇을 ‘크게 만드는 일’을 시도 할 수 있는 적절한 때입니다.”(우치다)

■ 약력

우치다 다쓰루 교수

△1950년 일본 출생. 현대사상가. 고베여대 명예교수. 프랑스 문학과 철학·사상을 중심으로 50여 년간 정치·교육·무도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고 가르쳐왔다.

배세진 연구원

△1988년 한국 출생. 정치철학자이자 문화연구자. 프랑스 파리-시테대에서 정치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매체와예술연구소 연구원. 저서 ‘금붕어의 철학’ 등.

문화일보·동북아역사재단 공동기획

박동미 기자
박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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