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 타이드, 사상의 썰물과 밀물 - (2) PC주의

 

메갈리아 사태로 촉발… 2017년 대선 거치며 본격 부상

“권력자의 약자 코스프레… PC개념 위협하는 오·남용”

 

美, 1990년대 대학내 ‘PC패권’ 부상… 획일성 강요

주류 언론·정치권력 진입하며 ‘새 편견’ 자리매김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2002년 7월 대선 기간 중 개혁국민정당 수련회에서 빚어진 성폭력 사건은 발생 당시 조직 논리에 밀려 축소·은폐됐다. 당 내부에서 공식 문제로 제기됐을 때 한 남성 간부는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며 깎아내렸다. 대선이라는 중차대한 정치적 흐름 속에서 내부 성폭력 문제 따위로 시간을 허비하면 되겠느냐는 차별과 독선이 깔려 있었다. 이는 한국 정치사에서 그토록 소수자의 권리와 차별 금지를 옹호해온 진보정당의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민낯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정치 논객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2022년 펴낸 저서 ‘정치적 올바름(PC)’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좌파 운동권에 ‘페미니즘’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특히 개혁당 사건을 예로 들며 “‘진보적 대의를 위해 성폭력 사건이 조직 밖으로 알려져선 안 된다’는 조직보위론에 의해 철저히 은폐됐다”며 “조직보위론은 2000년대에도 건재했다”고 분석했다. 즉, 21세기 초반까지도 국내에선 PC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실상 부재했던 셈이다.

미국에서 촉발된 PC는 차별과 편견을 줄이고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사회적·정치적 태도를 말한다. 여기서 약자에는 여성, 장애인, 빈곤층, 흑인 등이 포함되며 이들에 대한 언어적 차별에 반대해 저항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PC 운동이 국내에서 움트기 시작한 건 1980~1990년대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PC는 ‘혼혈아=다문화가정 자녀’쯤으로 치환되는 일종의 교정운동 수준이었다.

학계에선 한국 사회 전반에 PC가 깊숙이 투영된 시점을 2010년대 중후반부터라고 본다. 2015년 메갈리아 사태를 시작으로 2016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촉매로 작용했고, 2017년 대선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2016년 5월 18일 당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강남역 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SNS에 “다음 생엔 부디 같이 남자로 태어나요”라고 써 젠더 갈등에 불을 지폈고, 이듬해 2월 16일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뒤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제1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강 교수는 이른바 ‘K-PC주의’ 발전의 토양이 된 문재인 정부를 ‘약자 코스프레’의 시대로 정의한다. 그는 “권력자의 ‘약자 코스프레’는 PC 개념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PC의 오남용”이라고 강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비슷한 시기 PC의 본고장인 미국에선 오히려 이 담론에 대한 염증적 반응들이 새어 나왔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케이틀린 깁슨은 미 대선을 앞둔 2016년 1월 ‘PC라는 표현은 어떻게 칭찬에서 모욕으로 변했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PC는 더 이상 대학 내 성·인종·언어 규범을 둘러싼 전문 용어가 아니다”라며 “오늘날에는 조롱의 의미로 쓰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비평했다. 반(反)PC주의를 앞세운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그해 11월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거친 표현을 제외하면, 트럼프의 반PC주의 전략은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반환점인 2018년 예일대가 미국 성인 약 3000명을 상대로 수행한 심층 조사에선 응답자의 80%가 “PC주의는 미국 사회의 문제”라고 답변했다. 주목할 점은 이 비판이 보수층뿐만 아니라 자유·중도·흑인·히스패닉 등 PC와 가장 가까운 계층에서도 강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PC의 모체는 다원성과 다문화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인종과 정체성, 이민자가 뒤엉킨 미국은 이런 다문화 문제가 태동하기에 가장 비옥한 환경이었고, 지난 한 세기 동안 흥망을 반복하며 여러 차례 다른 세력의 무기로 작동했다. 1930년대 미국 공산당에서 PC는 당원이 특정 사안에 대해 취해야 하는 올바른 입장·언어의 개념으로 사용됐다. 1964년 당시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자동차노조 대회 연설에서 “우리는 정치적으로 맞아서가 아니라 ‘옳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라고 발언한 것을 계기로 PC는 진보적 이상을 뜻하는 의미로 확장됐다. 1980년대에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부흥기를 맞았다. 일부 학생운동 단체들이 PC를 정체성의 상징으로 채택하며 자랑스러운 휘장처럼 쓰기도 했다.

미국에서 반PC가 본격적으로 태동한 건 1990년대부터다. 1990년 9월 미국 텍사스대는 커리큘럼 개편을 통해 고전을 배제하고 소수우대정책 등을 주제로 작문 수업을 진행하는 ‘차이에 대한 글쓰기’ 도입을 확정했다. 같은 해 10월 28일 뉴욕타임스는 주말판 1면 ‘PC 패권의 부상’ 제하의 기사에서 “대학 내 PC가 ‘이데올로기적 획일성’을 강요하는 경향으로 변모했다”고 지적하며 텍사스대 사례를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이듬해인 1991년 5월 4일 당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미시간대 졸업식 연설의 대부분을 PC 비난에 할애하면서 이 논쟁적 담론은 급기야 주류 언론과 정치권력의 중심부로 본격 진입했다. “PC는 고귀한 욕망에서 시작됐지만, 결국 오래된 편견을 새로운 편견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PC의 핵심엔 ‘도덕’이 자리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도덕의 영역이 정치 담론으로 악용될 때 결국 사회 갈등은 증폭됐다. 정치적 쟁점이 도덕의 문제가 될수록 타협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워크(woke·깨어있다는 뜻)’ 문화와 결합한 PC를 두고 또다시 격렬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사회운동·학계 등으로부터 오랜 기간 조정을 거친 미국과 달리 정치권으로 곧바로 흡수된 ‘K-PC’가 떠안은 과도함, 그리고 이에 따른 갈등의 위험성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 PC를 둘러싼 갈등을 선거 전략에 활용하는 점만 보면 미국과 한국은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정치권의 결집 전략이 과도해질수록 중도층·언론·시민사회가 강하게 반작용을 일으키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트럼프의 2020년 대선 패배는 이 같은 기제가 작동한 대표적 사례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 PC는 팬덤,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 세력과 결합해 갈수록 양극단의 지지층만 결집시키는 분노의 도구로 점철되고 있다. 누군가 무심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다면 잘못을 지적하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제도를 보완하면 될 일이다.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정치적 낙인과 쐐기 박기는 사라져야 한다.

억압적 관용·해악 원칙… 사상에서 운동으로

 

■ PC주의 철학적 기반

PC주의의 사상적 기반은 ‘평등·반차별’이라는 규범적 직관이다. 비판이론, 후기구조주의, 현대 자유주의, 페미니즘 등 여러 사상이 겹겹이 얹힌 토대에 민권운동이 결합한 구조를 갖고 있다.

비판이론의 본산인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와 같은 굵직한 사회철학자들의 은거지였다. 그들은 권력 구조와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사회적 억압이 어떻게 문화 속에 내재하는지를 분석했다. 마르쿠제의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 개념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기존 지배 담론에 ‘비대칭적 관용’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낳았다. 이는 PC주의의 “언어는 권력이며, 불평등한 언어관행은 교정되어야 한다”는 명제로 이어진다.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인 미셸 푸코도 권력은 사회 제도뿐 아니라 언어, 즉 담론에 스며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PC주의 초창기 개념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운동의 ‘당 노선에 대한 이념적 올바름’에서 나왔고 이후 신마르크스 운동과 만나면서 계급 이외에도 인종·성별 등 권력관계 전반을 문제 삼는 방향으로 확장됐다는 견해도 있다. PC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의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차용해 언어적 표현은 타인에게 실질적 해악을 주는 경우 제한될 수 있다고 바라봤다.

페미니즘은 PC주의가 치켜든 횃불이었다. 오래전부터 언어가 어떻게 권력과 젠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지 연구해 왔던 페미니즘은 직업명에서 성중립 표현 사용을 요구했다. 1960~1970년대 미국 흑인해방운동, 여성운동, LGBTQ 운동은 차별적 언어와 상징과의 싸움이었다. 이는 PC주의가 단순한 사상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토대로 작용했다.

비판자들은 PC주의가 집단 정체성과 평등을 과도하게 중시한 나머지, 개인의 표현의 자유·진리 탐구를 억압하는 규범으로 변질됐다고 지적한다. 이를 ‘좌파적 집단주의 이념’ 혹은 ‘정치화된 도덕 검열’로 규정한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 등은 ‘PC에 대하여’(2019)에서 ‘PC주의는 과연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찬반토론을 벌인 바 있다. PC주의를 둘러싸고 이어지고 있는 사회적 진영 간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PC주의가 차용한 이론

비판이론: 권력구조와 이데올로기 분석, 사회적 억압은 문화속에 내재

후기구조주의: 언어적 규범은 정치적 행위, 차별적 언어의 해체 필요

페미니즘: 언어는 권력의 불평등 재생산, 젠더 정체성은 언어로 규정

다문화 자유주의: 소수자 보호를 위한 언어적·제도적 배려 자체가 정의

민권운동: PC주의가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 확립되는 계기

김성훈 기자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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