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근처럼 속이 드러난 나무들과 층층이 휘어지는 나뭇가지들/ 잠들 수 없는 나뭇잎들이 한쪽으로 쏠리듯/ 가을이 무너졌는데// 집에는 불볕처럼 끓고 있는 미역국이 있고/ 냉장고에는 화내서 미안하다는 쪽지가 있고/ 옷걸이에는 세탁소에서 막 돌아온 슈트 한 벌
- 이민하 ‘9201’(시집 ‘우울과 경청’)
가로수들 나뭇잎을 토해내는 가을 끝자락. 사람들 옷차림 두툼해지고 그만큼 나무들은 앙상해지고 아직 겨울이 아니다. 잔뜩 흐려진 하늘에서 눈을 기대하기도 이르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몸 움츠리며 지레 겁을 먹긴 하지만.
연말이라 하기에 이르다. 그런데도 한 해가 다 간 것만 같다. 기대하기도 아쉬워하기도 어중간하다. 마치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것처럼. 자꾸 빗자루를 들게 된다. 서점지기의 오랜 습관으로 방향 없이 발길에 채는 서점 앞 낙엽을 쓸어내고 있다. 부질없는 일이다. 빗자루를 내려놓기 무섭게 거리는 다시 낙엽으로 뒤덮이고 만다. 해가 짧다. 비질 서너 번이면 하루가 저문다. 성마른 몇몇 가게는 벌써 크리스마스트리를 요란히 장식해 놓았던데, 내 보기엔 그저 쓸쓸하고 허전해 보일 뿐이다. 사랑과 이해와 위로가 절실해지는 진짜 겨울이 오면 트리를 장식한 불빛이 제 몫의 온기를 전하려나. 그렇겠지. 그렇게 새해가 오겠지. 11월 말의 모호함에 유독 마음이 가는 건 지금 내가 통과하고 있는 시기가 꼭 이와 같기 때문이리라.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채 살고 있는 요즘, 나는 지금 창밖의 밤처럼 깜깜하다. 길을 잃을까 봐 두려운 아이처럼, 불 꺼진 서점에 한참 남아 있다. 창 건너 플라타너스는 아직도 떨어뜨릴 잎을 잔뜩 남겨두고 있었다.
귀갓길. 잘 마른 낙엽을 하나 밟아본다. 경쾌하게 바스러진다. 이것이 11월의 멋이다 생각해본다. 문자 메시지 알림이 울린다. 택배가 도착했단다. 길쭉한 상자 하나가 현관문에 기대어 있다. 그만 웃고 만다. 가자, 집으로. 택배 상자가 기다리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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