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현 과학콘텐츠그룹 갈다 대표

 

日서 번역한 과학기술 용어

과거엔 우리도 그대로 사용

 

행성 아닌 혹성도 그중 하나

지금 굳이 수정할 필요 있나

 

문화는 중첩 인정해야 풍성

그래야 더 깊어지고 넓어져

‘혹성탈출’이라는 영화가 있다.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첫 영화가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리메이크된 유명한 작품이다. 혹성은 한자로 ‘惑星’이고, 영어로는 ‘planet’(플래닛)이다. 혹성은 ‘planet’을 가리키는 일본말이다. 우리말로는 행성(行星)이다. 그러니까 ‘혹성탈출’은 ‘행성탈출’로 써야 마땅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과학과 기술 용어는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서양과의 접촉이 빨랐던 일본에서는 과학·기술 용어를 자국어로 번역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어로 번역한 과학·기술 용어들이 한자어로 이루어진 사례가 많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한자 용어들을 빌려서 사용했다. 그래서 두 나라는 대개의 과학·기술 용어들을 공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쏟아지는 새로운 과학·기술 용어를 두 나라가 각자의 방식으로 번역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행성과 혹성은 조금 다른 역사적 배경이 있다. 행성이나 혹성은 서양 용어를 그냥 번역한 게 아니다. 동양에서 오랫동안 행성이나 혹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태여 번역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냥 행성이나 혹성에 대응하는 용어로 ‘planet’을 인지하면 되었을 것이다. 태양이나 달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는 ‘planet’을 지칭하기 위해서 혹성이라는 용어를 쓸 이유가 없고 그동안 쓰던 행성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혹성탈출’이라는 영화 제목이 붙은 이유는, 과학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원작 제목을 보고 번역하고 윤문해서 제목을 붙이는 과정에서 생긴 해프닝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거의 없어진 관행이지만, 예전에는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관행이 있었다. 중역이라고 부르는 이런 행위가 만연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영향으로 일본 용어를 그대로 우리말로 번역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아마 꽤 많은 천문학 책이 중역 과정을 통해서 소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번역된 책에 일본말 용어인 혹성이 행성과 혼재돼서 사용된 시기가 있었다. 요즘은 그런 사례가 거의 없지만, 아직도 국내 저자가 쓴 책에서 혹성이라는 용어가 발견되기도 한다. 책을 쓰는 사람의 지적 게으름이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천문학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 중에는 여전히 혹성이라는 용어가 익숙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제목을 정한 사람도 아마 혹성이라는 용어에 별다른 생각 없이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혹성탈출’을 ‘행성탈출’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교양 과학에서 ‘planet’을 의미하는 용어로 혹성이라고 쓴 경우라면 꼭 행성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혹성탈출’은 그 자체로 문화적 생명력을 획득한 존재라고 본다. ‘혹성탈출’을 ‘혹성탈출’로 경험한 사람들에게 ‘행성탈출’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시작은 잘못이지만(사실 생존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혹성탈출’이라는 제목은 오류가 포함된 그 자체로 이미 많은 사람이 누리는 우리 시대의 문화가 되었다. ‘혹성탈출’이라는 제목을 떠올릴 때 느끼는 그 감정과 감성은, 제목을 바꾸면 어쩌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용어를 바로잡는다는 이유로 그동안 쌓인 역사적 맥락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혹성탈출’은 문화적 유산이다. 문화적 유산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물론 ‘행성탈출’이라는 제목을 걸고 ‘혹성탈출’을 전복하는 영화가 나오면 어떨까 하는 바람도 있기는 하다.

‘마징가 Z’도 ‘혹성탈출’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나는 ‘마징가 Z’를 우리나라 만화 영화로 알고 보고 자란 세대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인 줄 몰랐고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조금은 당황했지만, ‘마징가 Z’는 그런 출생의 비밀 때문에 단박에 이별하기에는 나와의 문화적 얽힘이 너무 강했다. 일본 만화를 우리 식으로 살짝 각색한 것에 속아서 살아온 셈이다. ‘마징가 Z’의 출처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전파되고 녹아드는 과정에 대한 비판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인지와 인식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꼭 필요한 절차라고 본다. 하지만 또 한편 시간과 공간 속에 쌓인 문화적 퇴적 현상을 부정하지 않는 지혜도 필요하다. ‘혹성탈출’과 ‘마징가 Z’의 실체를 파악하고 인지하고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작업을 문화적 퇴적암으로 이들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일본의 그림자는 그 자체로 외면할 수 없는 문화적 유산이다. 이미 우리의 것이 되어버린 문화유산이다. 문화적 중첩을 인정할 때 우리가 누리는 문화는 더 풍성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혹성탈출’은 ‘혹성탈출’로, ‘마징가 Z’는 ‘마징가 Z’로 남았으면 한다.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생각도 없다. 문화적 중첩의 범위와 반경을 조금 더 넓혀서 문화적 향유의 깊이와 넓이를 넓혔으면 한다. 그나저나 ‘마징가 Z’를 나는 여전히 ‘마징가 제트’라고 발음하는데, 요즘 세대는 혹시 ‘마징가 지’라고 발음하려나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그냥 촌스럽지만 ‘마징가 제트’라고 하련다.

이명현 과학콘텐츠그룹 갈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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