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논설위원

미국에서 1939년 제작된 흑백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가 있다. 필자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TV에서 ‘명화극장’ ‘주말의 명화’를 통해 본 기억이 어렴풋하다. 민주주의가 뭔지 잘 모를 때였지만 미국의 상원의원이 23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를 하다가 쓰러지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으로 운영되지만, 소수의 권리도 보장한다는 의미를 주었던 영화였다.

한국의 ‘스미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DJ는 민주당 재선 의원이었던 1964년 4월 20일 당시 자유민주당 소속 김준연 의원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으로부터 30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한 일로 체포동의안이 발의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의정 사상 첫 필리버스터를 벌였다. DJ의 당시 기록은 5시간 19분으로 한때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1969년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3선 개헌을 막기 위해 10시간 15분 동안 발언을 하면서 기록은 깨졌지만, 1973년 박정희 정권이 소수당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없애 버렸다. 2012년 국회법 개정(선진화법)으로 필리버스터 제도가 부활하면서 가장 먼저 이를 사용한 것이 지금의 민주당이다. 2016년 민주당은 정의당, 국민의당과 연계해 여당인 새누리당이 제출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해 38명이 참석해 192시간 25분간 필리버스터를 벌였다.

이후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이 지난 9월 26일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17시간 12분 동안 벌여 자신이 지난해 8월 전 국민 25만 원 지원법 반대 토론에서 기록한 15시간 50분을 넘어섰다.

민주당이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차단하기 위해 중단 요건을 완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지난 25일 발의했다. 국회법 제106조 제4항에는 ‘회의 중 재적 5분의 1 이상이 출석하지 아니한 때에도 제73조 제3항 본문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규정돼 있다. 본회의는 재적 5분의 1(60명)이 참석하지 않으면 산회하는데 필리버스터는 이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민주당은 똑같이 적용해 60명이 참석하지 않으면 무산시키겠다고 한다.

민주당이 이젠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한 DJ의 ‘스미스 유산’마저 지우려고 한다. 아마 영원히 다수 여당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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