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형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정부는 반도체 초격차 확보와 인공지능(AI) 3대 강국 도약을 국가적 목표로 내세운다. 그러나 그 목표를 실현할 핵심 동력인 연구개발(R&D) 현장에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한 치의 예외도 없이 적용해 자기모순 상황을 만든다. 과학기술의 ‘최고 수준’을 추구하고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이 시점에, 정부의 기술 선도 의지와 획일적인 노동시간 강제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연구자들이 필요할 때조차 충분히 몰입하기 어려운 경직된 제도는 국가전략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주 52시간제는 노동자의 근로 여건을 개선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보장하려는 입법 목적을 지니며, 이는 분명한 사회적 성과다. 그러나 제도가 옳은 취지를 담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산업 분야에 똑같은 기준으로 묶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최근 기술 발전은 고도의 지식 노동을 효율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지속 투자는 곧 기술 우위로 직결된다.
하지만 첨단기술 개발은 단순한 시간 투입의 선형적 노동이 아니라, 깊은 탐구와 문제 해결 능력이 결합된 창조적 노동으로 이뤄진다. 업무량이 시기별로 크게 변하고 특정 구간에서는 폭발적 몰입이 요구되며, 주요 기술 진전은 단기간 내 집중적인 시도를 통해 달성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실제 업무 강도나 성과보다 근무 시간에 의존하는 과거형 관리 방식은 기술 주도권 확보라는 국가적 목표와 맞지 않는다. 고도의 지식 노동은 시간의 총합이 아니라 창출 가치로 평가돼야 하며, 미국 등 주요 기술 선도국이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직에 대해 근로시간 규제보다는 성과 중심 보상을 택하고 있다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관점에서도 능력 있는 연구자들이 자아실현, 국가 발전 기여,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경제적 보상을 자신의 의지로 추구할 기회를 일률적으로 막는 게 바람직한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기술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연구자들의 성장과 동기 부여를 위해서는 자율성을 보장하는 유연한 제도와 적절한 보상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고도의 지식·기술 업무를 수행하는 전문 연구직에 한해 근로시간 규제를 최소화하고 성과 중심으로 평가하는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이러한 근무 체계의 유연성과 성과 중심 보상은 청년들의 이공계 선택을 이끄는 강력한 유인책이다.
최근 반도체 분야는 AI의 혁신에 힘입어 전례 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연구자라도 스스로 몰입할 수 있는 선택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성과를 내기 어렵고, 결국 국가 경쟁력은 구조적으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 최고 기술을 목표로 한다면, 기술 발전의 방식이 과거와 달리 자본과 지식 노동의 지속적 투입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R&D 특성상 주 52시간을 초과하는 집중적인 몰입이 불가피하다면, 초과 노동시간에 대해 높은 수준의 할증 보상을 의무화해 남용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자의 기본권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망은 유지돼야 하지만, 첨단 분야의 특수성을 고려한 합리적 제도 확립이야말로 한국이 기술 초격차를 확보하고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길이며, 이는 더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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