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영 경제부 차장
반도체와 수출 주도형 경제, 화폐 약세, 높은 외환보유액….
한국 같지만 대만 얘기다. 지난해 대만 경제성장률은 4.3%. 올해는 7.3%로 예상된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2년 만에 다시 한국을 추월했다. 겉으로 보면 부러울 만한 성적표다. 하지만 정작 대만인들은 냉소적인 반응이다. 그 이면에는 부진한 내수 경제, 월 149만 원에 불과한 대졸 초임, 초저금리, 한국에 버금가는 낮은 출산율이 자리 잡고 있다. 대만은 수십 년간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외환보유액 축적과 해외 투자로 대만달러 약세를 의도적으로 유도하며 수출 기업을 지원했다. 하지만 제조업은 중국 본토 등으로 이전했고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64%에 달하는 기형적 구조다. 대만의 대외자산은 GDP의 2배가 넘지만, 가계 몫은 미미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거시경제 지표상 빛나 보이지만 내수는 텅 비고 국민의 삶은 궁핍해진 대만을 ‘대만병(Taiwanese Disease)’에 걸린 것이라 꼬집었다.
한국은 의도치 않게 빠르게 오른 환율이 골칫거리다. 원인을 두고 진단이 쏟아진다. 서학개미(해외 주식 개인 투자자)와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유동성 과잉, 대미 투자 약속, 수출 기업의 달러 보유…. 무엇보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환율의 ‘자동 안정화 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원화 약세가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수출이 증가하면 자연스럽게 외환이 유입되면서 환율이 다시 안정되는 선순환 구조가 있었지만 이제 달라진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구조적 원화 약세로 인해 한국 경제가 대만과 유사한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국내 투자 여건 악화로 해외로 이전하던 기업들의 속도는 대미 투자 협상으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어차피 대미 투자를 늘려야 하는 기업들은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올 들어 9월까지 누적 경상수지 흑자는 전년 동기 대비 23% 증가했지만, 국내 투자로 그 온기가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14년 대외 순채권국으로 전환한 한국의 순대외자산은 이제 GDP의 55%까지 늘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서학개미를 환율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해외 투자 증가는 국내 성장 동력 약화가 만든 결과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구조적 요인으로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낮아지고 있다. 해외 투자 수익성이 국내 투자의 매력을 압도하니 해외로 돈이 나가는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양극화다. 해외 투자 여력이 있는 고소득층은 더 부유해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내수 침체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며 ‘한국병’에 걸리지 말란 법이 없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만든 경상수지 흑자 숫자에 안주할 때가 아니다. 국민연금 활용이나 기업 유인책으로 당장 환율을 안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국내에 투자할 수 있도록, 수출과 내수가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서학개미를 탓하기보다 구조조정과 규제 완화, 혁신을 통한 경제 체질 개선으로 한국 경제의 투자 매력을 끌어올리는 데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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