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국제부장

 

슈퍼리치 과세안 압도적 부결

자본 유출과 경제 불안에 반대

스위스 부채비율은 EU의 절반

 

OECD, 韓에 퍼주기 정책 경고

韓 728조 예산에 부채 50% 넘어

감당 못할 빚 남긴 선조 돼서야

스위스 루체른의 한 암벽에는 창에 찔린 채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끌어안고 죽어가는 사자가 조각된 ‘빈사의 사자상’이 있다. 이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대혁명 당시 루이 16세 등 왕실 인사들을 끝까지 호위하다 전멸한 스위스 용병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 근위대마저 도망친 상황에서도 스위스 용병들은 전장을 이탈하지 않았다. 스위스 용병들은 이보다 앞선 1527년 신성로마제국군의 로마 약탈 때도 목숨을 바쳐 가며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거나, 적이 더 많은 돈을 제시하면 편을 바꾸기 일쑤였던 당시 용병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스위스 용병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불리하다고 도망칠 경우 후손들이 용병으로 일하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에서였다. 농업이 국부의 중심이던 시절, 국토가 온통 산인 스위스가 그래도 큰돈을 벌 수 있는 길은 용병이 거의 유일한 상황에서 후손들의 일이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선조들의 희생은 오늘날 화려한 의상으로 유명한 교황청 근위대가 스위스 군인들로만 구성되는 전통으로 남았다. 후대에 부담을 넘기지 않으려는 스위스인들의 국민성은 최근 국민투표에서도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지난달 30일 스위스 국민은 5000만 스위스프랑(약 914억 원) 이상 재산을 소유한 부자들에게 상속세율 50%를 물리도록 하는 내용의 이른바 ‘슈퍼리치 과세안’을 부결시켰다. 반대가 무려 78.3%나 나온 압도적 부결이었다. 상속세를 물게 되는 대상은 2500명 정도로 스위스 인구(896만7407명)의 0.028%에 불과했지만, 국민 4명 중 3명이 반대한 것이다. 스위스를 구성하고 있는 23개 주 모두 반대투표가 과반을 차지했고, 아펜첼이너로덴주와 슈비츠주는 반대표가 각각 91.0%와 90.6%에 달했다. 법안을 제출한 극좌 성향의 청년사회주의자당(JUSO)은 법안 통과 시 연간 60억 스위스프랑(약 10조 원) 세수가 확보돼 부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국민의 지지는 21.7%에 그쳤다. 이는 10년 전인 2015년 6월 14일 역시 부자들에게 상속세를 매기는 법안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29%였던 점과 비교하면 더 하락한 것이다. 이러한 포퓰리즘 법안에 편승하는 정치권도 없었다. 현지 매체 스위스인포 등에 따르면 연방정부는 법안 통과 시 자본가와 기업, 자본 유출로 세수가 감소할 수 있으며, 가족 기업의 승계가 어려워질 수 있다며 공식적으로 반대를 권고했다. 대부분 정당도 경제와 재정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스위스가 포퓰리즘적 제안을 부결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5년에 부유층 대상 상속세 부과 법안을 부결시킨 다음 해인 2016년에는 모든 성인에게 매월 2500스위스프랑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안도 유권자 76.9%가 반대해 부결됐다. 당시에도 연방정부는 근로 의욕 약화로 경제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반대투표를 권고했다. 하원은 기본소득안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노동조합 일부도 반대 의견을 냈다. 무리한 기본소득 추진 시 사회보장제도 축소나 세금 대폭 인상 등 후폭풍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지금 세대가 당장 편하자고 곳간을 털어 쓰면, 결국 그 후과는 다음 세대가 안게 된다는 진실을 스위스 국민과 정치권, 노조들은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스위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는 37.5%로 유럽연합(EU) 평균(80.7%)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지난 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경제전망’에서 한국에 대해 “단기 지원이 장기적 재정 누수로 이어지면 안 된다. 지출 계획에는 공공 재정을 지속 가능한 경로로 되돌리겠다는 초당적 약속이 뒤따라야 한다”고 각종 퍼주기 정책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하지만 한국 정치권은 같은 날 지역사랑상품권 지원(1조1500억 원) 등이 담긴 727조9000억 원의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내년 국가채무비율은 51.6%로 사상 처음으로 50%를 넘어서게 됐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이 촉구한 재정준칙 법제화는 요원한 상태다. 이대로라면 우리 세대는 당장의 편안함을 위해 후대에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남긴 선조로 기록될 것이다.

김석 국제부장
김석 국제부장
김석 기자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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